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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담장 위 하얀 찔레꽃 7화

by 향기로울형

7화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


“자, 공주님, 가실까요?”

종례를 마치자 성우가 주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주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성우가 싹싹 비는 시늉을 한다. 성우는 주현이의 그 표정을 좋아했다. 사실 주현이는 예뻐서 웃기까지 하면 너무 화려하다. 차라리 새침한 게 더 매력적이다.

“성우야. 나 할 말 있어.”

“응?”

“우리 관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데. 나, 너랑 사귀는 거 아니야.”

“아 왜 또 선 긋고 난리지? 그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성우와 달리 주현은 농담을 모르는 아이니까 괜히 하는 말은 아닐 거라 성우는 생각했다.

돌아온 대답은 담백했다.

“응.”

“응?”

“응.”

“누구?”

“……”

성우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뭐야 내 심장이 왜 이래?’

“정말 누가 있는 거야?”

주현이의 코끝이 빨갛다. 성우는 그간 자신이 주현에게 했던 고백들이 말하자면 소꿉놀이 같은 거였음을 깨달았다. 방금 가슴에서 느껴진 충격이 진지한 감정의 시작임을 알렸다.

“누가 있긴 한데, 걔가 좀 이상해.”

“너를 안 좋아한대?”

“아니, 좋아한다는데 그게 고백이 아니고 사귀는 것도 안 된대.”

주현은 그런 헛소리를 한 사람이 성우라도 된 것처럼 화난 표정이 되어서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뭔 헛소리지?”

“몰라. 잊어. 나도 잊을 거야. 그래도 너는 아니니까 너도 나 잊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주현.

“좀 걷자.”

성우의 제안에 주현이도 답답한지 따라 걸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되 대상이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성우는 주현이를 주현이는 재영이를 서로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찻길을 벗어나 내리막길을 걸으니 연못가에 꽃이 피어 있었다.

“진지하게 말할게. 걔 성적이 몇 등급인지 알아?”

“한.... 4등급 5등급?”

“그렇지? 너랑 나는 평균 등급이 1.1야. 더 잘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대학 가면 다 찢어질 걸 왜 만나냐? 괜히 네 마음만 복잡해지는 거야. 사람 그렇게 쉽게 사귀는 거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성우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음을 느꼈다. 평소에도 다습한 성우의 손이지만 거짓을 말할 때는 더 손이 축축해진다.

“그럴 수도 있지.”

주현은 수련처럼 청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사람도 아름다워지는가? 순간 성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첫 번째 감정인데 그렇게 점수 따라 매칭하듯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고서 주현은 성우를 돌아보았다.

“너도 내가 너랑 같은 평균등급 1.1여서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졌다. 조금 전 성우는 자신이 얼마나 애틋한 마음으로 주현이를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느꼈다.

“야, 신재영. 네가 뭔데 튕기냐? 천하의 성주현이 너 좋다고 하면 네, 하고 달려가는 게 옳지!”

다음 날 진성우는 성주현을 어디에다 떼어놓고 와서는 재영에게 따지고 들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네 놈이 그런 식으로 마음을 줄 듯 말 듯하니까 성주현이 너한테 말리는 거잖아. 너 같은 새끼는 며칠 만나보면 바로 별 볼 일 없다는 거 금방 알 텐데. 네가 자꾸 거리를 두니까... 성주현이 좋다고 할 때 만나. 내 장담한다. 너는 딱 사흘, 길어야 일주일이야. 알지 명품과 짝퉁. 명품과 짝퉁은 어떻게 구별한다? 가까이 봐야 한다 이거야. 너 같은 짝퉁 새끼들은 금방 티 난다고.”

“말이 좀 심하다. 진성우. 그러다가 내가 주현이랑 사귀게 되면 너는 아예 기회가 없는 거 아닌가?”

“백만분의 1의 확률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할 수 없지. 그게 주현에 대한 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해 두지 뭐.”

“싫어.”

“와, 말로 안 되네. 왜 싫은데?”

재영은 비속어를 섞는 성우의 말투에 반감이 생기지 않는 자신을 놀라워한다. 성우의 깔끔한 옷차림과 자신감 있는 표정, 그리고 총명해 보이는 눈빛 때문에 그가 하는 욕설은 그의 완벽함을 누그러뜨리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느낌은 완벽한 정장 차림에 살짝 벗어난 듯한 운동화가 더 감각 있어 보이는 것처럼 성우를 더 인간미 있는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진짜 네 말대로 될까 봐 싫어.”

“와, 이놈 자아상이 똥일세.”

재영은 성우의 자신만만한 사랑이 부러웠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다른 남자애를 좋아한다고 하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어쩌면 허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선명한 성우의 표정과 딱 부러지는 말투가 한없이 부럽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정말 성적표에서 나오는 것일까? 예전에 한 친구가 말한 게 기억이 났다.

‘나 초등학교 때 뭐든지 잘하지 않았냐? 공부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그때 왜 철봉 거꾸로 돌기 시범도 선생님 대신 내가 했었잖아. 그런데 이상하지? 고등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성적이 안 오르니까 다 못하겠는 거야. 지금은 공부만 못하는 게 아니라 체육도 음악도 못한다. 웃기지?’

재영은 아닌 말로 자아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들이 유독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면 안개처럼 희미하다. 어쩌면 그게 자신의 자아상일지도 모른다. 희미한 안개....

주현... 네가 물었지? 그거 고백이냐고. 내가 그거 고백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네 얼굴...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던 거 알아? 그때 알았어. 너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니 우린 시작도 못 해보고 둘 다 실연을 당한 셈이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가사를 붙여달라고 했던 그 노래, 너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거? 너를 보면 멜로디가 자꾸 떠올라 그 멜로디를 하루 종일 흥얼거렸어. 그 멜로디를 부르면 뮤직비디오처럼 네 모습이 떠올라. 집중할 때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거랑, 앞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못 참고 자꾸 쓸어 올리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핀을 꼽는 거, 발표할 때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는 거, 그리고... 성우랑 장난칠 때 짓는, 성우 앞에서만 짓는 새침한 표정까지도.

“이거 내가 쓴 곡인데 네가 노랫말을 써볼래? 바쁘면 말고.”

주현, 그날 내가 너한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솔직히 놀랐어. 넌 나랑 친하지도 않잖아. 몇 번 말도 안 붙여본 사이인데 내가 내민 악보에 당황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날 너의 새로운 표정을 봤어. 내 기타 소리와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네 표정이 맑은 시냇물 같았어. 그때 네 앞머리가 흘러내렸는데도 쓸어 올릴 생각도 안 하고 고요하게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때 뭐라고 했더라? ‘재주 좋다. 딱히 어렵지 않으면서 곡이 좋네.’

그 후로도 몇 번 우린 같이 나란히 앉아서 노래를 불렀잖아. 네가 지은 노랫말을 붙여서. 첫 번째 가사도 두 번째 가사도 마음에 들었어.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이제 더는 같이 앉아서 노래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뜸을 들였던 거야. 네가 마지막으로 준 노랫말은 좀 슬펐잖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작곡하고 네가 작사한 우리들의 노래는 딱, 그 정도인 게 맞다고. 흔한 사랑 노래처럼 애절할 것은 없지만 시작도 하지 못하고 우린 둘 다 실연한 셈이니까. 너무 슬플 것은 없지만 그래도 두고두고 기억날 슬픔일 테니까. 안녕, 내가 처음 좋아한 성주현.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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