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여행 갔다가 회오리처럼 내 마음이 과거로 끌려갔다. 채만식과 그의 소설들. <탁류>를 읽었다. 놀랍다. 예전에 읽었을 때 눈여겨보았던 구절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토씨 하나 안 바뀐 채로 그대로 박혀 있구나.'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
명일이 없는 사람들(=내일이 없는 사람들이란 뜻)
입만 가졌지 손발이 없는 사람... 이것이 정주사다.
정주사는 일할 능력도 의욕도 없는 양반의 끄트머리로 "고현지고!"(=고얀지고)를 내세우며 미곡을 이용한 노름판에서 만판 논다. 생계를 위해 아내가 삯바느질을 하고 살림은 어린 딸들이 한다. 일제강점기 미곡의 수탈지로 번성했던 군산, 미곡을 이용한 노름이란 요즘 주식 투자와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미리 값을 예측하여 투자를 하고, 실제 장이 열렸을 때 값을 확인한 다음 남는 돈을 수입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투자한 돈을 잃기도 한다. 어느 날은 벌었다고 먹고 마시고, 어느 날은 잃었다고 먹고 마시고. 그러는 사이에 자본금은 모두 녹아 없어져버렸다. 정주사는 사업 밑천을 마련해준다는 고태수의 꾐에 넘어가 딸 초봉이를 억지로 시집보낸다. 초봉이도 집안을 위하는 것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고태수에게 시집을 간다. 현대판 심청이다. 그러나 초봉이는 연꽃을 타고 신분상승을 하는 장치 따위는 없었다. 공금횡령범이면서 난봉꾼인 고태수가 횡령 사실이 들통나자 죽어버리고, 고태수 친구인 등이 굽은 장형보는 초봉을 겁탈한다. 도망 가는 초봉을 약국의 고용주인 제호는 안락함을 미끼로 훼손한다. 청순하고 아름답던 초봉이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형보를 엄청난 분노의 발차기로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여자가 된다. 단 하나 남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능력한 가장은 결국 가족을 그렇게 죽음 끝으로 내몬다. 그러고도 허허허, 사람 좋은 척해 봐야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끔찍한 노릇이다. 가부장적 남성, 기형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자본주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틈바구니에서 지고지순했던 초봉이는 탁류에 휩쓸려가고 만다.
그러나 왜 초봉은 하다 못해 자신을 좋아하는 건실한 승재를 선택할 용기마저 없었을까? 여자의 덕목은 순종뿐이라 생각하는 초봉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안락함에 대한 동경 때문일 수도 있다. 유독 여자는 안락한 집을 선망한다. 남자가 자동차의 기동력을 선망한다면 여자는 예쁜 꽃과 따뜻한 소파를 소망한다. 안락한 가정. 그것은 어쩌면 여자의 진취성을 꺾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태평천하>에서 빛나던 풍자는 사라지고 통속 소설에 가까운 스토리를 보이고 있는 <탁류>를 읽으면서 채만식의 절망을 느낀다. 풍자에는 비판과 비꼼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있다. 그러나 <탁류>에는 나아가야 할 긍정적인 좌표가 없다. 모두 와르르 무너져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엉망인 채로 탁류에 휩쓸려가고 없다. 그게 채만식이 그리고 있는 1930년대 군산이었다. 적산가옥과 일제 강점기의 건물들을 기웃거린다. 비릿한 바닷바람이 섞여 있다. 나는 과거 어느 시점의 길 잃은 사람처럼 이 거리에 서 있다. 맥고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사람 좋게 웃지만 마음에 희망을 잃어버린 채만식처럼 나도 웃으며 사진을 찍지만 나아가야 할 삶의 좌표는 무엇인지 희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