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Illustrator>

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by 콜드포인트

벡터 그래픽 디자인 도구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곧 현대 디지털 디자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Adobe Illustrator)는 1987년 1월 발매된 이래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래픽 디자인 산업의 중심에 서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초기의 단순한 벡터 드로잉 도구에서 출발한 일러스트레이터는 오늘날 인공지능(AI) 기술까지 탑재한 첨단 설계 소프트웨어로 변모했다. 이 글은 일러스트레이터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기능들을 거쳐 발전했으며, 현재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차분한 톤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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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서 컴퓨터로: 벡터 그래픽의 혁신적 탄생

일러스트레이터의 탄생은 하나의 좌절감에서 비롯되었다. 1982년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Xerox PARC)에서 일하던 존 워녹(John Warnock)과 척 게쉬케(Chuck Geschke)는 인쇄 기술의 혁신을 꿈꿨지만, 제록스는 그들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두 과학자는 결국 제록스를 떠나 1982년 어도비(Adobe)를 설립했고, 가장 먼저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라는 혁명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포스트스크립트는 비트맵(bitmap)이 아닌 수학적인 베지어 곡선(Bézier curves)을 기반으로 했으며, 이를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를 어떤 크기로든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게 되었다.


워녹의 아내 마르바(Marva)는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그녀는 손으로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다양한 선 굵기를 조절하며,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작업인지를 알고 있었다. 워녹은 아내의 일상적인 고민을 디지털 솔루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일러스트레이터의 아이디어가 비롯되었다. 1985년부터 엔지니어 마이크 슈스터(Mike Schuster)가 주도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일러스트레이터는 포스트스크립트 코드를 생성하는 드로잉 인터페이스로서 설계되었다. 그리고 1987년 1월, 애플 매킨토시(Apple Macintosh) 플랫폼을 위한 일러스트레이터 1.0이 출시되었다.


초기 일러스트레이터는 매우 기본적인 벡터 드로잉 도구였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1988년 일러스트레이터 88(버전 1.6)이 발매되면서 새로운 도구와 기능들이 추가되었고, 1989년에는 바이트(Byte) 매거진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구별되는 우수 제품"으로 선정했다. 당시 업계 최강자로 여겨지던 알더스의 프리핸드(Aldus FreeHand)마저 일러스트레이터에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플랫폼 확장과 인터페이스 혁신의 시대 (1989-2000)

일러스트레이터가 애플 매킨토시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9년이었다. 1989년 버전 2.0으로 윈도우(Windows) 운영체제 지원이 처음 시작되었지만, 초기의 윈도우 버전은 사용자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버전 2.0은 매킨토시 버전과 비교하여 기능이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윈도우 환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코렐드로우(CorelDRAW)와의 경쟁에서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 버전 3.0이 발매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버전 3.0부터는 계층화(layers) 기능이 추가되어 복잡한 디자인 작업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사소해 보이는 기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디자이너들의 작업 흐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중요한 혁신이었다. 1993년 버전 5.0이 발매되었을 때는 색상 분리(color separations), 특정 색상 지원(spot color support), 그리고 패스파인더(Pathfinder) 연산이 추가되었다. 패스파인더는 여러 도형을 합치거나 빼거나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모양을 만들 수 있는 도구로, 이것이 곧 현대 벡터 디자인의 가장 강력한 기능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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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1997년 버전 7.0의 등장과 함께 일어났다. 버전 7.0은 경로 편집(path editing) 부분에서 대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 개선을 단행했으며, 동시에 어도비 포토숍(Photoshop)과 동일한 인터페이스로 통일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변화로 인해 많은 기존 사용자들이 업그레이드를 꺼렸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장기적으로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버전 7.0부터는 트루타입(TrueType) 글꼴도 지원하기 시작했으므로, 포스트스크립트 1형(PostScript Type 1)과 트루타입 사이의 오랜 "글꼴 전쟁"도 이제 막을 내렸다. 또한 플러그인(plug-in) 지원이 시작되면서 써드파티(third-party) 개발자들이 일러스트레이터의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창의적 도구의 대폭 확충: CS 시대로의 진입 (2003-2012)

2003년은 일러스트레이터 역사에서 또 다른 분수령이 되었다. 어도비는 포토숍, 인디자인(InDesign) 등과 함께 일러스트레이터를 창의적인 스위트(Creative Suite, CS)라는 통합 패키지로 묶어 발매했기 때문이다. CS 버전은 버전 11로 표기되었으며, 무엇보다 처음으로 3차원(3D) 이펙트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다. 이것은 벡터 기반 소프트웨어가 평면 디자인을 넘어 입체적 표현의 영역으로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5년 CS2 버전에서는 맞춤형 작업 공간(custom workspace)과 컨트롤 팰릿(control palette)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 무렵 어도비는 알더스를 인수하면서 경쟁사의 프로그램이었던 프리핸드도 함께 손에 넣게 되었다. 2007년 CS3 버전에서 어도비는 프리핸드의 고급 기능들을 일러스트레이터에 통합하기 시작했는데, 라이브 컬러(Live Color) 기능이 바로 그것이었다. 라이브 컬러는 복잡한 디자인에서 색상을 훨씬 쉽게 변경할 수 있는 기능으로,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환영받았다. 또한 여러 개의 자르기 영역(crop areas), 이미지 트레이스(Image Trace)의 선배인 이미지 레디(Image Ready), 그리고 색상 가이드 패널도 함께 추가되었다.


2008년 발매된 CS4 버전은 다양한 도구 개선과 함께 프리핸드에서 물려받은 혁신적인 기능들을 선보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다중 아트보드(multiple artboards) 기능이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하나의 문서 내에서 여러 버전의 작업물을 동시에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블롭 브러시(Blob Brush)는 여러 개의 겹치는 벡터 브러시 획(strokes)을 쉽게 병합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개선된 그래디언트 도구(gradient tool)는 색상 조작과 투명도 처리에 있어 훨씬 깊이 있는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2010년 CS5 버전의 등장은 회화적 표현이 벡터 그래픽의 영역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피어스펙티브 그리드(Perspective Grid) 도구와 브리슬 브러시(Bristle Brush)가 바로 그것이었다. 피어스펙티브 그리드는 3차원적 깊이감 있는 원근법 드로잉을 가능하게 했으며, 브리슬 브러시는 전통적인 회화 재료의 질감을 벡터 선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 더하여 "아름다운 획(Beautiful Strokes)"이라고 명명된 광범위한 획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


2012년 CS6 버전은 16번째 세대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이 버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도입되었으며, 레이어 패널, RGB 코드, 색상 램프(color ramp) 등이 개선되었다. 또한 머큐리 퍼포먼스 시스템(Mercury Performance System)이라는 새로운 성능 체계가 도입되어 처리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이 시점에서 일러스트레이터는 이미 벡터 그래픽 편집의 업계 표준이 되어 있었고, 세계 수백만의 디자이너들이 매일 이 프로그램으로 창의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구독 모델의 시대와 클라우드로의 전환 (2013-2019)

2013년은 어도비의 사업 전략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해에 일러스트레이터는 더 이상 일회성 구매 제품이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Creative Cloud, CC)라는 월간 또는 연간 구독 서비스의 일부로서 판매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 사용자들 중 일부에게는 저항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빠른 업데이트 주기와 더 나은 기능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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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CC 17(초기 CC 버전)은 창의적인 협업을 위한 여러 기능들을 제공했다. 색상, 글꼴, 그리고 프로그램 설정을 클라우드를 통해 동기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문서를 클라우드에 저장하여 여러 기기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비핸스(Behance)라는 창의적 협업 네트워크와의 통합도 이루어졌다. 터치 기반 타입 도구(touch-compatible type tool), 브러시 내 이미지 지원(images in brushes), CSS 추출(CSS extraction) 기능도 추가되었다.


2014년과 그 이후의 년도들에서 일러스트레이터는 계속해서 진화했다. 2015년 CC 2015 버전에서는 그래픽 처리 장치(GPU) 성능에 대한 대응이 강화되었다. 2017년 CC 2017 버전에서는 픽셀 그리드 자동 조정 기능 등이 추가되었고, 2018년 CC 2018 버전에서는 여러 페이지의 피디에프(PDF) 파일을 불러올 수 있는 기능이 포함되었다. 2018년의 업데이트에서는 퍼펫 워프(Puppet Warp)라는 강력한 변형 도구도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벡터 그래픽을 자연스러운 외형을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공지능 시대로의 도약 (2020-현재)

2020년부터는 어도비가 인공지능(AI) 기술을 일러스트레이터에 본격적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문서(cloud documents) 기능이 본격화되었으며, 배경 자동 저장(background save) 기능도 추가되었다. 2023년 일러스트레이터 2023 버전에서는 고급 인공지능 기능들이 대거 탑재되었고, 3D 이펙트도 더욱 정교해졌으며, 실시간 협업 도구들도 강화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2024년에 찾아왔다. 2024년 일러스트레이터 2024 버전(버전 28.0)에서는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을 활용한 세 가지 획기적인 기능이 소개되었다. 첫째는 "텍스트 투 벡터 그래픽(Text to Vector Graphic)"인데, 이것은 간단한 텍스트 설명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그에 맞는 벡터 일러스트레이션을 생성해주는 기능이었다. 예를 들어 "미니멀 스타일의 사자 머리(lion head, minimalist style)"라고 입력하면 즉시 해당하는 벡터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리타입(Retype)"이라는 글꼴 식별 기능으로, 로고나 기존 디자인에서 사용된 글꼴을 사진으로 찍거나 붙여넣기만 하면 자동으로 그 글꼴을 인식하고 유사한 대안까지 제시해준다. 셋째는 "목업(Mockup)" 기능인데, 벡터 일러스트레이션을 애플리케이션 스크린샷, 광고판, 티셔츠 디자인 등 다양한 실물 템플릿 위에 자동으로 배치해준다. 이제 디자이너들이 예전에는 몇 시간을 들여 해야 했던 고달픈 작업들이 순식간에 완성될 수 있게 된 것이다.


2024년의 이후 업데이트들에서도 인공지능 기능들이 계속 강화되었다. 버전 28.6에서는 "생성형 도형 채우기(Generative Shape Fill)" 기능이 베타 버전으로 도입되었으며, 이것은 이미 그려진 도형의 내부를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상세한 벡터로 채워주는 기능이었다. "텍스트 투 패턴(Text to Pattern)" 베타 기능도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텍스트 프롬프트(prompt)만으로 매끄러운 무늬 패턴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것이었다. 여러 달에 거쳐 손으로 직접 만들던 패턴을 이제는 몇 번의 클릭만으로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25년의 업데이트들에서도 인공지능 기능의 고도화는 계속되었다. 생성형 색상 변경(Generative Recolor) 기능이 100개 언어에서 상용화되었으며, 리타입 베타 기능도 계속해서 향상되었다. 2025년 6월의 업데이트에서는 "생성형 확장(Generative Expand)" 기능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기존 그래픽의 경계를 넘어서 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자동으로 이미지를 확장해주는 기능이었다. 또한 연필 도구(Pencil Tool)가 대폭 개선되어 마우스나 태블릿 펜을 사용할 때 더욱 직관적이고 반응성 있는 드로잉 경험을 제공하게 되었다. 색상 선택 시 16진수(hex) 코드나 CSS 색상 이름을 단축키로 입력할 수 있는 기능도 추가되었으며, 라이브 페인트 버킷(Live Paint Bucket) 도구도 빠른 그래디언트 적용을 지원하도록 업데이트되었다.


최신 세대: 인공지능과의 완전한 융합 (2026년)

2025년 10월 28일, 어도비는 일러스트레이터 2026 버전(버전 30.0)을 정식 출시했다. 이것은 일러스트레이터 시리즈의 30번째 세대로, 벡터 디자인에 있어서 인공지능이 얼마나 깊이 있게 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버전이었다. 버전 30.0은 완전히 새로워진 글꼴 브라우저(font browser)를 제공하여 글꼴을 찾고, 적용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훨씬 간편해졌다. 색상 관련 기능들도 대폭 개선되었는데, 그래디언트 도구에는 디더링(dithering)과 지각적 색상 혼합(perceptual blending) 기능이 추가되어 더욱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색상 전환이 가능해졌다. 스냅핑(snapping) 기능도 향상되었으며, 아트보드 관리 기능도 더욱 쉬워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턴테이블(Turntable)" 베타 기능으로, 이것은 2차원 오브젝트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주므로 새로운 창의적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협업을 위한 "프로젝트(Projects)" 기능이 도입되어 팀원들과 작업을 조직하고, 공유하고,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도비 파이어플라이(Firefly)라는 자체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과의 통합도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파이어플라이가 생성한 이미지를 직접 일러스트레이터 내에서 삽입하고 정제할 수 있으며, "텍스트 투 벡터 그래픽" 기능에서도 다양한 파이어플라이 모델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어도비 익스프레스(Adobe Express)의 템플릿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어 디자인 작업을 더욱 빠르게 시작할 수 있다. 버전 30.0의 또 다른 특징은 성능 최적화에 있다. 전체 응용 프로그램의 성능이 현저히 향상되었으며, 이는 더 복잡한 프로젝트도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공지능과 벡터 그래픽의 결합에서 오는 계산 부하가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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