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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의 다정함에 기대어

다정한 세계

by 꿈꾸는 날들

내 젊은 날의 대부분은 버티는 날이었다.


때때로 마주했던 기쁨과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왔던 슬픔, 그 사이에 있던 많은 날들은 대체로 무료하거나 지극히 평범하거나 그도 아니면 하루의 무게를 버텨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이렇다 할 성공이나 화려한 행복들은 늘 내 몫이 아니었고 삶은 왜 이토록 지루할까 싶은 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날,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놓지도 못해서 서글펐던 날, 너무 보잘것없어서 흐릿하게 기억조차 나지 않던 날들도 더러 있었다. 악함과 편법이 승리하는 것을 목도하며 허탈감에 잠을 이룰 수 없던 밤,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게 가라앉던 날들. 그러다 가끔씩 지루할 만큼 평범한 날들이 오히려 감사하다 생각했던 날들도 있었다. 행복이 분명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도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탓하지 않고 밋밋하고 시들한 일상을 누덕누덕 기워가면서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건 대단한 이유나 엄청난 결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하루만큼씩 내 삶을 비춰주던 다정한 마음들, 그 마음이 나를 무너지지 않고 계속 걸으며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다정한 마음들이었다. 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마음이 될 때면 항상 떠올리는 기억이 하나 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추운 새벽녘이었는데 잔뜩 비뚤어진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엉엉 울면서 출근을 하던 날, 누군가 정성스럽게 눈을 치워놓은 길이 너무 반듯하고 예뻤다. 누가 알아준다고 그냥 대충 치워도 됐을 텐데 한 올 한 올 마음을 쓸어 담듯 가지런한 빗질로 정리해 놓은 그 길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내 삶은 여전히 휘청이고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단단히 붙잡아주는 것 같은 느낌. 넘어져도 괜찮을 거 같다는 묘한 안정감이 나를 안아주었다. 다른 사람이 걸어갈 길을 이토록 정성스럽게 치워놓는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걸까? 금방 다시 더럽혀질 텐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누군가의 하루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었을 그 다정함이 내 안에 깊이 박힌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천천히 내 일상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내 삶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걸. 무심코 지나치는 거리에도, 너무 익숙해져서 때론 투닥거리는 관계 안에도 내 삶에는 누군가 보내주는 다정함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자신의 삶은 모서리가 반쯤 구겨져있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그 마음, 따뜻한 친절과 배려. 그 다정함이 공기처럼 떠다니면서 나를 계속 안아주고 있었다.


나는 다정함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삶은 결국 관계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수히 많은 관계들로 얽혀 있다. 관계는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서로를 향한 다정한 마음은 소통을 통해 서로를 채워주고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어준다. 누군가를 위하는 착하고 따뜻한 마음. 그 선하고 다정한 마음이 세상을 지켜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삶이 아무리 퍽퍽하고 되는 일 하나 없는 시간을 그저 버텨야 한다고 해도 오늘 누군가 내 삶에 걸어둔 다정한 마음을 알게 되면 다시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이 하등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누군가의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다시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일으키는 관계로 이어져있다. 어떤 의도나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오늘 내가 택한 선함은 선순환을 하며 누군가의 삶을 일으키는 온기가 되어준다. 그 착한 마음들이 함께 모여 선한 세상을 만들다 보면 언제가 악함과 불행, 슬픔마저도 이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제나 선한 사람이 될 자신은 없지만 그럼에도 선을 선택하는 사람정도는 되고 싶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누군가의 다정함을 입은 사람의 도리로써 나를 둘러싼 세상에 계속해서 다정한 마음을 보태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때때로 그런 마음들이 나를 살게 했다. 나의 어떤 행위나 존재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도착했던 타인의 다정함.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달려가 함께 무게를 나눠 들고, 여리고 약한 존재들을 보면 돌봐주고 싶은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 자신의 기분이나 상황과는 상관없이 타인에게 웃어줄 수 있는 여유를 놓치지 않으며 누군가의 아픔이나 절망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는 마음.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호의와 자신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굳이 건네주는 친절. 너무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삶의 구석구석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다정한 마음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음 다칠 일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 안에 그 다정함 마저 소멸된다면 사는 일은 얼마나 삭막해질까?


행복은 결국 곁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다정함이 깃들어 있다면 우린 서로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함이 깃들어 있는 사람들이 돼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몫만큼 삶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삶에도 슬픔과 외로움이 전혀 없는 생은 없으니까. 각자의 삶에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서로가 기댈 수 있는 다정한 마음들을 조금씩 나누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 다정함에 기대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서로를 향한 다정한 마음들이 선순환하는 세상. 나는 다정함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행복에 닿을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는 게 문득 힘들다고 느껴지는 날,

아무리 버텨도 나아질 게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날

누군가 당신에게 보낸 다정한 마음들이 여기저기에 걸려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를.

그 다정한 마음에 기대어, 서로의 다정함에 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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