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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날들 Nov 04. 2024

책을 사랑하는 일

작은 책방으로 오세요

"지금 뭐 하고 있어?"


"책 읽고 있어."


"또 놀이터에 있구나."


나에게 놀이터는 늘 책방이었다. 마음이 아플 때 혹은 휴식이 필요할 때 평범한 어떤 하루의 끝에도 언제나 나는 책방으로 향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고단했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던 나만의 비밀 아지트. 혼자 구석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생각을 늘어놓았다 차곡차곡 정리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안에 무언가 가득 채워지는 느낌도 좋고,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마음을 누군가 쉽게 풀이하듯 써놓은 책을 발견하는 일도 좋았다. 그러다 인생을 뒤흔드는 어떤 문장을 만나는 날이면 그 감동을 쉬이 달래지 못해서 혼자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은 동네 작은 책방들이 거의 사라져서 대형 서점이나 독립서점들을 찾아다니지만 장소가 어디든 책들로 둘러싸여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참 좋아한다. 대형서점 보다 작은 책방을 더 선호하는 건 책방지기 특유의 감성이 묻어있어 따뜻하고 정감 가득한 공간이 주는 위로가 좋아서인 것 같다. 책을 아끼는 마음으로 공간에 정성을 담아놓은 곳에 있다 보면 하루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륵 하고 풀어진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내 방은 벽면이 가득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 반쪽 같아 차마 버릴 수 없는 책들을 모두 이고 지고 사느라 책들의 방 한 귀퉁이를 빌려 사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으나 그마저도 좋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 책에서 나는 오묘한 향도, 내 작은 방안에 이토록 무수히 많은 세계가 살고 있다는 사실도. 지금은 아이들 짐에 밀려나 내 책장은 작은 베란다 쪽방 신세가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나만의 서재를 갖는 일이 나의 로망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이덕무라는 조선의 선비를 알게 되었는데, 1761년에 쓴 <간서치 전: 책만 보는 바보>라는 짧은 자서전에 그는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고 늘 자신의 자그마한 방에서 온종일 햇살을 따라 상을 옮겨가며 책을 보았다고 했다. 책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햇살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읽었을까. 자서전에서 그는 방문을 열면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이 한꺼번에 모두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고 적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그 마음을 머나먼 옛날 조선의 선비도 느끼고 있었다니. 그리고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 이렇게 책에서 같은 마음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어찌나 반갑던지. 책 속에 담긴 그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순간이 주는 설렘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가끔 책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책을 펼치면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 적어놓은 마음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 마침표와 쉼표 하나에도 숨겨있을지 모를 작가의 마음을 읽는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헛헛한 마음이 책을 통해 채워질 때가 있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싶은 문장이 가득한 책을 만나는 일,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문장들로 채워진 책을 만나면 그날은 하루종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고이 접어 책 속에 숨겨두고 책에서 만나는 모든 마음에 기대어 위로를 받는다. 책에 취하고 좋아하는 문장에 취해 있을 수 있는 시간들이 참 좋다.


부끄러움이 많고 소심했던 나는 내 마음과 다른 속도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어려워서 곧잘 책으로 숨었다. 책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내가 열어놓은 만큼씩 마음에 스며들어 주었고 그 조용한 속도가 나는 좋았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복닥 했던 마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책 속에 적혀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을 얻게 되는 점도 좋았다. 언제든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마도 계속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평생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을까.   


지금 나의 단골 책방은 작고 따뜻한 조명 그리고 좋아하는 책 한 권으로 이루어진 책상이다. 모두가 잠들어있는 새벽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 일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아까워하며 책장을 넘기고 창밖의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조용히 방과 밖의 공기가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보며 흐트러진 생각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오늘 하루도 행복해지겠다는 다짐을 한다. 오늘 읽은 책 한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한다. 이 문장처럼 내 하루도 간결하고 소박한 하루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좋은 문장을 종이에 따라 적으며 내 삶도 이 문장을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노트에 가득 적힌 글처럼 내 삶도 좋은 이야기로 기록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오늘 어떤 변수가 출몰해도 내 삶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아 책을 읽는다. 더디더라도 결국은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걸어가겠다는 마음을 담아 하루의 시작을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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