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살면서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은 군수(郡守), 혹은 군수의 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군수라고 생각했고, 군수 부인 또한 군수와 맞먹는 권력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행정 조직으로 볼 때, 시어머니가 살았던 곳에서 군수가 가장 높은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인구가 많지 않던 지역이라 군수의 존재감이 도시와는 다르게 뽑힌 자치단체장이 아니고, 과거에 임명된 군수는 주민들을 대하는 태도나 행정 마인드가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장들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군수네 집안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꽤 가깝게 지낸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 결혼식 주례도 그 군수가 했으니까요. 그리고 시어머니가 군수 부인을 지칭하여 '동생'라고 했으니, 저는 당연히 '이모'라고 불렀지요. 저는 결혼 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군수 부인이 시어머니의 친동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할 당시에는 그 군수가 제 친정집 주소지의 시장이었어요. 친정에서도 시장이 제 시이모부인 줄 알고 든든하다며 좋아했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제가 군수 부인을 친이모인 줄 알고이모라고 부르며, 예의를 갖추어 챙겼던 것을 생각하면 씁쓸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직접 농사를 지어 거둔 율무, 팥, 검정깨, 녹두, 고추 등이 새로 날 때마다 시어머니는 이것들을 머리에 이고 군수 부인에게 갖다 주는 걸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외국산 농산물들이 많이 들어와 국산 농산물 중에서도 귀하게 대접받던 것들이었지요. 시어머니는 참기름도 수시로 짜서 군수 부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저희에게는 아껴서 먹으라고 조금씩밖에 안 주던 참기름이었지요.
제가 군수 부인 '이모'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군수 부인에게 갖다 주는 것들이 언니가 여동생을 챙겨주는 정도를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시어머니가 거의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 같았고요. 제가 그 집에 가본 적은 없지만, 시어머니로부터 들은 말로만 짐작해도 저희 시집보다 훨씬 잘 살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시어머니와 군수 부인이 친자매 관계가 아님을 알아채는 데는 꽤 오래 걸렸지요.
그러던 중 제가 시집에 갔다가 시어머니에게 고추장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장독대에서 작은 고추장 항아리를 가져다가 보자기에 싸주었습니다.
"옛다, 군수네 고추장이다!"
순간 저는 궁금했어요. 고추장은 시어머니가 잘 만드는 것 중 하나였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니의 말 대로라면 군수 부인이 고추장을 주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군수 부인은 왜 하필 고추장이 흔한 저희 시집에 굳이 고추장을 챙겨주었을까 궁금했지요.
"이모님이 웬 고추장을 다 주셨어요?"
"그게 아니고, 우리 아들이 고시 파스했는데 못 돼도 군수는 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우리 집 고추장이 군수네 고추장이지."
시어머니는 'pass; 패스'를 꼭 '파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군수네 고추장'이라고 말하는 시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미 군수 어머니가 된 듯한 표정이었지요. 그 당시 시어머니는 넷째 아들을 지칭할 때 '경욱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고시 파스한 아들'이라고 했지요. 전화를 할 때도 상대가 누구든 '나 경욱이 엄마, 고시 파스한 경욱이 엄마'라고 스스로를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다른 아들도 누구 못지않게 제 몫을 하고 있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특별히 행정고시에 합격한 넷째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하늘을 찌를 듯한 그 자부심을 무기로 며느리들 앞에 힘센 시어머니로 서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어머니가 최소한 군수는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아들은 군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은 도청이 있는 도시의 부시장에 이어서 도청에서 부지사를 거쳐 중앙부처 차관을 끝으로 역임하고 퇴직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어쩌면 그 아들과 함께 살면서 고위 관료의 어머니로서 권력과 호사를 누리고 싶었을 거예요. 시어머니는 저희 집에 살면서도 그 아들 집을 줄곧 기웃거렸거든요. 만약 시어머니에게 선택권이 있어서 다섯 아들 중 함께 살고 싶은 아들을 꼽으라면 첫 번째가 그 아들이었을것입니다. 시어머니는 가끔 명절 무렵이면 일부러 그 아들 집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지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선물을 쌓아놓고, 며느리가 날더러 하나 풀어보란 말을 안 하더라. 경욱이 공부할 때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냐? 경욱이가 시험 볼 때는 지리산 천왕봉을 세 번이나 올라가서 그 차디찬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 기도했었다. 그런데, 책 한 권 안 사준 며느리가 그 복덕을 다 누리고 사니 너무나 허망하고 분하다."
넷째 시동생이 도청에서 부지사로 일할 때였어요. 시어머니는 일부러 그 아들의 관사에 가서 며칠 지내며 수행 직원이 집 앞까지 오는 아들의 출퇴근 의전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아들의 눈부신 출세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그 모습을 두고두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지금 시어머니는 머릿속이 치매로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아직도 고향의 군수실에 앉아 있는 그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어머니가 아는 한 가장 폼나는 사무실, 좋은 관사, 영향력 있는 부인, 많은 선물이 쌓이는 일은 과거 고향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던 군수만이 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