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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하는 것

by 희수공원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을까. 계속 뿌옇게 걷히지 않는 안개 같은 환영이 손을 휘저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희서를 휘돌며 흔들려 안간힘을 쓰는 도대체 보이지 않는 이 찜찜함이 무엇인지 두렵다.


[이미 내 곁에 오 년도 넘게 머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혼잣말처럼 내뱉은 건 실수였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를 저 바닥까지 속속들이 모두 아는 그에 대한 습관을, 바라보는 방향마다 항상 존재하는 내 눈썹 같은 사람에게 무심코 쏟아버린 것이었다. 그런 시간을 갖은 가진 건 요즘 느끼던 지루함을 깨고도 남을 만큼 나의 촉각을 90도로 세우는 일이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구나. 앙금을 걸러내어 더 곱게 전했어야 하는 건가. 그는 계속 있을 거야. 응,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나를? 그를? 나의 습관을?]


아무렇게나 갈겨써놓은 글이었다. 이런 글을 읽고 쪽지까지 보낸다고? 관계의 얽힘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면 가벼운 피해 의식 같은 건가. 갑자기 웃음이 났다. 다 읽지도 않은 쪽지 한 줄 메시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희서의 시간이 맥없이 그렇게 허비되고 있었다. 틀렸다는 '갖은'을 '가진'으로 고쳤다. 이게 무슨 큰 문제라고 쪽지까지 보내는 사람이 있다니, 희서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말을 스승의 날 할게 뭐야. 학생들에게 받은 꽃 몇 송이를 식탁 위에 놓으며 허기진 하루를 달래려 저녁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식탁과 접혀 열린 주방 문 사이에 서서 그냥 말을 해버렸다.


'오랜 시간이야. 네가 오기 한참 전... 그는 계속 있을 거야. 난 그를...'


무채색 빛으로 지나가는 그의 눈을 읽었다. 이내 온화한 미소로 나를 마주 보는 사람이다.


'그래, 알고 있어. 사람이 머무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실체를 갈라놓을 수는 있지만 마음의 시간을 어찌할 수는 없지. 괜찮아. 하하, 신희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는 거, 무엇보다 소중한 실체야.'


진심으로 고마워해야 할 순간에 왜 쓸쓸해졌던 걸까. 실체와 마음이 하나였다면 하는 꿈이 허망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관계들은 자연스러웠다. 그녀로 인해 꺾인 여러 마디의 흔적, 아니 지루한 고통들을 혼자 짊어지지 않겠다는 이기심이 발동했을까. 희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그런데 심장을 누르는 이 지근대는 통증은 어디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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