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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소장

에필로그 5-4

by 희수공원 Feb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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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가슴에 안고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습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읽어도 이상하게 매번 새롭습니다. 제가 쓴 소설에 제가 빠져서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씁니다. 부끄럽고 유치한데 신기하고도 기쁩니다.


촘촘한 별처럼 다닥다닥한 기억의 조각들을 상상으로 이어 붙이며 새로 만들어진 시간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소설을 쓰는 주변에서, 그 안팎에서 저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들 먼지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것들을 지금도 사랑합니다.

 

사이버 공간에 글을 쓰니 그 강렬한 블루 라이트 속에서 편하게 눈을 맞추며 읽어 내려갈 수가 없더군요. 또한 제가 쓴 이야기들을 촉감으로 느끼고 싶기도 했습니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저의 상상으로 벌써 책을 가슴속에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표지는 하드커버에 천으로 하고, 천에는 멋지게 그림을 그려 넣고, 표지만으로도 소장하고 싶고, 페이지를 180도로 펼칠 수 있고, 어느 곳을 펴도 정갈하게 정렬된, 눈에 편한 종이책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멋진 안목과 기술을 가지고 소장용 책을 한 땀 한 땀 만드는 예술가가 제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실현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가슴속 책꽂이에서 슬며시 빼내 보여주려던 책은 원하는 색이 나올 수 없어 표지를 천으로 할 수 없다는 말에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습니다. 세상에 아름답게 프린트된 천이 그리도 많은데 왜 색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어요.


하드커버, 양장 제본, 무광 코팅, 미색 모조 100그램, 형압 글씨... 맨 처음 단어인 '하드커버'를 제외하고는 거의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글자로 메모하며 대체 어떻게 타협해야 제가 원하는 책을 손에 쥘 수 있을지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다는 것들을 어그러뜨리는 말의 조사 하나에도 자잘한 상처를 계속 받아가며 저 또한 오기가 솟았습니다.

  

상상을 실현시키는 일은 가슴이 터질듯한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책의 제목과 제목에 맞는 분위기, 그림의 스타일까지 신비한 힘에 이 현실이 되었고, 그에 맞춰 순수 미술 작가는 캔버스 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제가 원하는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 보내 주었습니다.


그 멋진 그림을 천에 새겨 꼭 표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결국 제가 개별로 찾아낸 천 인쇄 업체와 상담을 따로 하면서 원하는 코발트블루를 최대한 반영하여 책표지를 천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북바인딩 공방의 예술가와 조금씩 어긋나는 대화가 속상하고 기운이 빠졌지만 제가 크게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여러 가지 일들이 거슬렸지만 정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들의 손에서 제 책이 결국 만들어질 텐데 조금이라도 더 기분 좋게 나오길 바랐습니다.


열 권의 책을 받던 날을 기억합니다. 제 삶을 채워온 희로애락의 가치들이 상상으로 이어지고 겹쳐지고 뜨거워진 이야기가 실제 책으로 나와 손으로 만졌던 첫 순간의 떨림이 여전합니다.


제가 사랑 아끼는 사람들에게 책을 건넸을 때의 부끄러움도 잊지 않을 겁니다. 그 부끄러움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을 쓰니다.  


생각지도 못한 흥분되는 시간들 속에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여러 부정적인 형용사들, '이상한, 미친, 정신 나간...' 등등도 행복하게 접수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가장 가까운 날짜 기한인 두 곳의 출판사에 투고를 하기로 하고 그에 따라 퇴고를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또 뜯었습니다. 


남은 것은 스물세 개로 줄인 목차와 여전한 여러 오타들, 실수와 낙방입니다. 하지만 숙하게 겪어오던 것들이라, 고백이 부끄럽지만, 오히려 마음이 후련합니다. 한 고개를 잘 넘었습니다. 


소장용으로 공예품처럼 만든 책을  지인으로부터 듣는 감은 또 다른 새로운 기쁨이기도 합니다읽는 것이 부담이라면 가만히 책꽂이에 꽂아 두어도 괜찮습니다. 란 그림의 표지가 그리 초라하지는 않을 겁니다.


바람이 있다면, 컵라면 덮개나 냄비 받침으로 쓰이지는 않기를요. 하지만 그 또한 기록이 될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비싼 덮개나 받침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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