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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리 Oct 10. 2023

[서른수집기] LP를 수집하는 출판사 직원 여름의 서른

화학과 전공생이 출판사로 가게 된 사연


여름이와는 스무 살에 처음 만나 올해로 딱 10년이 되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처음 동아리방에 갔던 날, 여름이는 빨간 뿔테 안경을 끼고 내 옆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졸업을 할 때까지 우리 둘은 누구보다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했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여름이가 라식을 한 이후에는 빨간 뿔테안경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름이는 화학과를 전공하였고, 부전공으로 국어국문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 출판사에서 화학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처음에는 국문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는 여름이의 이야기에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전공과 부전공을 모두 살려 일을 하는 걸 보며 여름이야 말로 요즘시대가 요구하는 융복합적 인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 5시 50분에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여름이의 서른을 수집해 보았다.


- 자기소개 부탁해~

안녕하세요. 수원 토박이 서른 살 여름(가명)입니다. 출판사에서 과학 교과서를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 교과서 전문 출판사인가?

교과서도 만들고. 교과서 시즌이 아닐 때는 참고서나 문제집도 만들어. 교과서가 제일 큰 주 업무야.


전공은 화학이요, 부전공은 국문이니

- 교과서를 만들면서 하는 업무는 뭐야?

나는 중학교 과학 중에서도 화학 담당이야.  학교 선생님들이나 교수님 같은 저자 선생님들이 원고를 써서 주시면 교육 과정 성취 기준에 맞게 써졌는지 확인을 하고 내용 오류나 이런 거 없는지 같이 검토해. 그리고 배치는 어떤 식으로 해서 글을 쓸 것이며 어디에 어떤 사진을 넣을지를 관리하고 있어.

- 그렇구나. 총괄이네. 하나부터 열까지.

응. 나도 처음엔 많이 놀랐어. 사실 문제집은 처음 기획할 때만 어려워. 원고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큰 틀에다가 만 정리하면 되고, 문제 오류 없는지나 간단한 맞춤법 교정 교열 보는 수준에서만 끝내면 돼. 근데 교과서는 정해진 틀이라는 게 없어. 우리 교과서 생각해 보면 그림이 어떤 데는 크게 있고 작게 들어갈 때도 있고 그러잖아. 그런 걸 다 자유롭게 최적화된 걸로 구성을 해야 되더라고.


- 일한 지는 얼마나 된 거야? 그전에도 출판사에서 일했었지?

그렇지. 이제 1년 하고 3개월 됐어. 그전 출판사는 성인 대상 자격증이나 수험서를 제작하는 곳이었어. 거기서는 문제를 내부에서 만들기도 하고, 기출문제 해설을 쓰거나 했었지. 하지만 힘들었다. 하하. 내가 이직을 하게 된 제일 큰 이유가, 물론 연봉이 제일 크긴 했지만, 전문 분야가 아닌 걸 해야 되는 게 힘들었어. 나 자신이 전문성이 없는 일을 하는 것 같았어. 진짜 분야가 다양했거든. 한국사 시험, GSAT(삼성 채용시험), 공무원도 했었고.


- 지금 하는 일은 좀 어때? 할 만해?

어려워. 하하. 내 전공 분야이긴 한데 과학을 놓고 살다가 다시 하는 거니까 계속 공부를 하면서 해야 . 또 글이나 사진을 편집하고 구성하고 이런 것들에 미적 감각이 필요하더라고. 사진을 예쁘게 배치를 해야 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아직 경험이 적어서 한계를 느낄 때도 있는 것 같아.


- 이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 원래 전공이 화학과인데 국문을 부전공으로 한 이유가 있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하고 국어를 제일 좋아했어. 중학교 때도 당연히 문과를 갈 거라고 생각을 했고 중학교 때 꿈도 편집자였어. 그러다 고등학교 때 과학시간이 재밌어서 이과를 쓰고 화학이 재밌어서 전공까지 하게 됐지. 근데 대학교에 들어가서 화학 공부를 해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른 거야. 너무 어렵고 내가 상상했던 거랑 달랐어.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도 사실 되게 막 기대를 많이 했거든. 약간 로망도 있었고. 근데 막상 실험해 보니까 막 속이 매스껍고 머리 아프더라고. 전공에 흥미가 없으니까 대학생 때 공부를 안 하게 됐어. 그러다 국문학과를 부전공으로 하게 됐지.


-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을 것 같아.

맞아. 대학교 3, 4학년 때 방황을 많이 했어. 휴학하고 수학 강사도 해보고, 나중에 교보문고 알바도 했었고. 그러다가 국문학과 교수님이 나한테 과학도 하고 국문도 한 게 분명히 나중에 큰 메리트가 될 거라고 말씀을 해주신 게 기억이 나. 과학 잡지같이 너만이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얘기를 해주셨거든. 어떻게 보면 지금 하는 과학 교과서나 문제집이 나한테 제일 최적화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경험한 것들이 다 통합돼서 교육 출판이라는 일로 이어진 것 같아. 결국엔 다 지금의 밑거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는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어.

자연산 곱슬머리는 여름이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


5시 50분에 시작하는 하루 

- 출근할 때 하루 일과는 어떻게 돼?

아침에 5시 50분에 일어나. 30분 만에 준비하고 지하철을 타고 한 번 갈아타서 회사 근처에 내리면 7시 반이야. 8시부터 근무를 시작하고 일하다 5시에 퇴근해. 집에 오면 저녁 먹고 할 일 하다가 보통은 11시에는 자려고 노력을 해. 
 

- 와, 5시 50분에 눈이 떠져? 시차근무가 있어서 8시 출근인거지?
그렇지. 출근 시간을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로 30분 단위로 조절을 할 수 있는데 나는 지금 시간이 제일 좋은 것 같아. 지하철도 앉아서 갈 수 있고. (제일 중요하지) 기존에 8시 반 출근할 때는 거의 서서 갔었거든. 그래서 그때는 너무 앉아서 가고 싶었어. 한 30분 타고 가는데 계속 서서 가면 그날 하루 종일 피곤하거든. 그래서 중간에 내리는 특정한 사람 얼굴 기억해 놨다가 그 사람 앞에 서 있고 그랬어. 지금은 거의 앉아서 가니까 훨씬 낫지.

 
- 그렇게 퇴근하면 주로 뭐 해?

퇴근하면 밥 먹고 설거지 도와드리고 그때부터 이제 드러누워가지고 뒹글거리고 하지. 사실 작년까지는 그래도 여름에 태권도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러닝도 하고 그랬었는데, 올해는 하기도 싫고 힘들어가지고 그냥 맨날 드러누워가지고 유튜브 보고 그렇게 되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퇴근 후에 딱히 하는 게 없어. 이게 요즘의 걱정거리이기도 하고.

 

아날로그가 주는 매력, LP

- 일 외에 관심사나 열심히 하고 있는 게 있어?

요즘 LP를 열심히 모으고 있어. 사실 LP가 비싼 취미잖아. 한 판에 기본 5만 원이라 시작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영역 중 하나였는데, 현상이(하현상, 그룹 호피폴라의 멤버)가 LP를 두 번 정도 냈거든. '턴 테이블이 없어도 팬이니까 사야지! 언젠가는 듣겠지!' 하는 마음으로 샀었어. 그러다 올해 초에 결혼한 친구가 집에서 턴테이블을 딱 틀어줬는데 새 집에 예쁜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스피커가 웅장하게 울리는 게 너무 좋았어. 그래서 1월에 턴테이블을 샀고, 턴 테이블을 사고 나서부터 LP를 한 달에 최소 한두 개씩 사 모으고 있어. 지금은 20개 좀 안 되게 모은 것 같아. 근데 단점이 있어. 내가 늦게 시작해서 내가 갖고 싶은 LP들은 이미 절판이 됐고 그걸 사려면 이제 미개봉 중고를 사야 돼. 그럼 이제 가격이 2배 3배로 뛰는 거지. 제일 비싸게 주고 산 건 10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아.


- 우와, 10만 원짜리는 어떤 LP인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내 인생 드라마가 LP로 나왔었어. 그건 매물도 거의 없었어. 그래서 진짜 중고나라, LP 카페, 그리고 번개장터, 당근 이런 데 다 키워드 알람 해놨었는데 우연히 딱 올라와서 샀지.


- 어렵게 구한 매물이네! 네가 산 LP들을 자주 들어?

근데 이게 생각보다 귀찮더라고. 턴 테이블 켜고 LP를 올리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재생을 해. 근데 한 판에 생각보다 노래가 많이 안 들어가. 4곡? 많으면 5곡. 그게 끝나면 다시 턴 테이블로 가서 뒤집어줘야 해. 
 
 - 완전 아날로그구나!

진짜 아날로그야. 아날로그에 돈을 많이 쓰고 있어. 이번 달도 지금 두 개나 사가지고 진짜 지출이 커. 요즘은 맨날 퇴근하면서 퇴근길에 이제 LP 카페에 들어가서 새로운 거 올라온 거 있는지 확인하고, 예스 24에 LP 전용관 들어가서 한 번씩 보고. 그걸 놓치면 피눈물 흘린다는 걸 알았으니까. 살까 말까 고민일 때 일단 사야 되더라고.


- 얘기하는데 일 얘기할 때보다 훨씬 즐거워 보여.

하하하. 부자가 돼야 돼. 돈 쓸 때가 최고 재밌어.

여름이의 LP컬렉션. 가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LP.

서른은 특별할 것 만 같았는데

- 서른이 되면서 새로 하게 되는 고민들도 있어?

어릴 땐 서른이 뭔가 특별할 것 같았는데 작년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도 하고. 지금은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안 하고 있으니까 내가 퇴근 이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 옛날에 해금도 배우고 했었거든. 일 외에 뭔가 건전한 취미가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지금은 안 하고 포기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요 근래 만나는 사람들이 점점 한정되어 가는 걸 느끼고 있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위해 동호회 같은 걸 나가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겨도 같이 볼사람이 없는 거야. 물론 혼영(혼자영화)을 가끔 하긴 하는데 그거랑 좀 다르잖아. 그러니 '내가 영화 같이 보자고 말할 친구가 이렇게 없었나?' 싶은 거지. 서로 거리도 멀고 시간 맞추기도 힘드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는 건데도 그런 게 있더라고. 주변에 내가 너무 사람을 거리 두고 살았나 이런 생각도 들고.


- 연애도 안 한 지 꽤 됐지?

그렇지. 나는 사실 28살에 결혼하는 게 목표였어. 진짜로 28살에 결혼을 했을 줄 알았다? 근데 내가 연애 운이 없는 건지 연애 경험도 별로 없고 기간도 다 짧았어. 그것도 좀 고민이긴 해. 나는 결혼을 하는 게 목표이고 여건이 된다면 아기도 한 명쯤은 이제 낳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 길게 연애를 뭔가 해보지 않았으니까. 사실 연애 이전에 트루 럽(True Love)을 해본 적이 없어. 하하하.


- 트루 럽이라면?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까지 안 가더라도, 주변의 친구들만 봐도 사랑 때문에 울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아직 뜨겁게 이성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이성 간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조금 고민이지. 짝사랑도 열렬하게 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가끔 이게 맞나 이런 생각이 좀 들어. 좀 초조하기도 하고. 사실 나는 외롭지는 않아. 지금처럼 살아도 문제는 없는데 결혼은 또 하고 싶으니까.


연애를 해야 결혼을 하는데 그 이전에 사랑을 아직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직 이 단계를 못 진행시켜 본 게 조금 흔치 않은 것도 같고. 내가 신중하게 보고 안전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만나기 힘든 것도 있는 것 같아.


- 정말 솔직한 고민이네. 얘기해 줘서 고마워. 네가 트루럽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좋겠다.
그러게. 어딘가에 운명처럼? 하하.


앞으로 지나게 될 30대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을까?

내가 옛날부터 그 목표가 있었어. 서른이 되기 전에 헌혈 30번 하기! 헌혈을 30번 하면 국가에서 은장을 줘. 그래서 그걸 하는 게 목표였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해서 아직 22번인가밖에 못했어. 근데 서른 안엔 어려울 것 같고 목표를 좀 바꿔서 서른세 살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하하하.


- 와, 22번 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은장 받으면 자랑해 줘!




여름이의 서른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LP를 한 장씩 수집하고, 헌혈 30번을 위해 헌혈의 집을 방문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하나씩 보러 가는 날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의 인생은 이처럼 어떤 날들로 조금씩, 조금씩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엄청나게 특별한 서른이 아닐지라도 상관없이 말이다.

여름이는 반곱슬인 나보다 훨씬 더 곱실거리는 머릿결을 가지고 있다. 여름이가 항상 매직을 하고 다니다가 더 이상 매직을 하지 않고 자신의 곱슬머리를 있는 그대로 오픈하기 시작한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 모습이 정말 당당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름이의 유니크한 곱슬머리를 누구보다 좋아한다.

대학교 시절 여름이와 나는 서로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주기로 약속했고, 아직 둘 다 감감무소식이다. 여름이의 마음을 뜨겁게 할 트루럽이 얼른 나타나길 기다린다. 여름이에게 축가를 불러줄 그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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