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열세 살 소녀와 시
비밀 일기장이 있었다. 6학년이 되자마자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엄마가 손에 쥐여 준 돈으로 조용히 근처 문방구에 가서 작은 열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을 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작은 열쇠는 제 기능을 하기에는 너무 얇고 형식적이어서 작은 장식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는 파스텔 빛깔 예쁜 편지지 같은 속지로 가득한 나만의 비밀 일기장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또 전학생이 된 처지라 친구도 없었고, 주변에 말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라고는 그 비밀 일기장이 유일했다. 나의 비밀 친구에게 내 이름 ‘해달’을 풀어서 ‘일이랑 월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왠지 비밀 친구가 두 명이 된 느낌이었다.
- 열세 살 소녀의 일기장에서 [일이랑 월이에게]
엄마랑은 다시 헤어졌어.
할 수 없지.
내가 이해해야지.
여자 혼자 애 넷을 키우는 건 너무 힘들어.
어진이랑 나는 새엄마와 살아본 적이 있으니까 다시 살 수 있어.
아빠도 어진이는 장손이라 어차피 엄마에게서 빼앗아 가려고 했고.
어진이는 아직 어려서 나라도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
언젠가 새엄마는 싸리나무로 어진이 등과 팔에 핏줄기가 생기도록 때린 적이 있다.
지금은 새엄마가 2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더 잘해주는 것 같아.
자기 친정 식구들이 다 이곳, 부산에서 살아서 더 안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나는,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나.
너무 울어서 눈물샘이 다 말라버릴 것만 같은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서 많이 힘들어.
엄마는 다시 3년 뒤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는 게 이젠 너무 힘들 것 같아.
다시 쓸게.
다시 눈물이 나서.
* 사랑은
사랑은 슬픈 거예요.
나의 맘을 눈물로 맺게 하거든요.
파아란 하늘 아래에
초록빛 풀잎 위의 이슬처럼
햇빛이 유리창에 가득할 때
부스스 눈 비비며 고개를 내밀고
바람에 스치며 생각하죠. 그리고 곧
하얀 이슬 조각으로 변해선
떨어졌다가 반짝하고는
다시 부서져 사라지죠.
그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 별 없는 밤
세상이 눈을 감고, 아빠가 눈을 감고,
엄마가 눈을 감고, 아가가 꿈나라 열차를 타고 있을 때,
스르륵 소리 나고, 밖으로 나왔어요.
하늘을 쳐다보고, 속눈썹을 스르르 깔았어요.
다시 저너머 저너머로 고개를 들었을 때,
앗! 이슬이 반짝했어요.
별 없는 밤에 보석은 소녀의 눈물이래요.
이슬이래요.
* 다시, 다짐
암흑의 세계에서 빛을 찾아, 어려운 가운데 웃음을 갖자.
이렇게 무지개를 그렸습니다.
또 이렇게 푸른색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차가운 빗줄기는 다시 찾아왔고,
무지개를 지우고 푸르름을 얼룩졌습니다.
그래도 비를 좋아하자.
언제나 비 온 뒤엔 무지개가 그려지고 푸르름이 싱그러워지지.
이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아니었습니다.
무지개는 저 멀리 꿈이었고, 보이지 않는 꿈이었으며
푸르름도 꿈이었습니다.
꿈을 사랑하고 꿈을 기다리나 세월이 바람이라면 지칩니다.
이내 지쳐 쓰러져가는 풀일지라도 나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멀리’를 볼 수 있는 한 가지로 나는 재생합니다.
저기 무서운 흑으로만 싸여있어 볼 수도 없는 곳의
저주받은 인생을 생각하며,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말하고
암흑의 세계에서 빛을 찾아, 어려운 가운데 웃음을 찾자고.
- 에필로그:
‘일이랑 월이’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하고 싶은 말이, 쏟아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비밀 일기장에 내 마음을 담았다. 원망을 담았다가, 다시 희망을 담고, 다시 울분을 쏟아내고, 다시 다짐을 하고. 아마도 사춘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른이 되어 그 시절 ‘글’로 풀었던 나의 흔적들을 살펴보면서 생각한다. ‘소녀야, 잘했다. 그리고 다행이다. 참 좋은 친구를 찾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그리고 누군가 나의 어린 시절, 그 소녀처럼 힘겨워하는 청소년이 있을 때, 조용히 비밀 일기장을 건네주고 싶다. ‘아이야,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도 돼. 말하기 힘들면 그림을 그려도 좋아. 이 공간은 너만의, 너를 위한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