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슬쩍 꺼내 본- 시화전, 따뜻한 시선

12. 시화전, 따뜻한 시선

by 해달
ch12.png

새엄마와 아빠는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 새엄마의 얼굴이 하얗고 귀여운 여자 아기는 세 살이 되었고, 새엄마의 친정엄마가 낮 동안 돌봐주는 것 같았다. 새엄마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8시 정도에 아빠와 일을 나가고, 저녁이면 또 밥을 하고 빨래를 했다. 나는 새엄마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진이와 나를 다시 받아준 새엄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다녀오면 집 청소를 하고 어진이와 내 빨래도 틈틈이 했다. 그래서인지 새엄마와 나와의 갈등은 거의 없었고, 이웃집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 집의 착하고 공부 잘하는 의붓딸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간 평화롭게 지냈다. 새엄마와 살던 동네는 대부분이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우리 집은 열 가구 정도와 함께 마당을 같이 썼다. 성냥갑 같은 네모난 집들이 칸칸이 일렬로 붙어있어 옆집에서 소리라도 지르면 저 끝집까지 다 들렸다. 각 집의 방은 한 칸이었고 허리를 숙이고 일어설 정도의 높이가 되는 다락방이 딸려 있었다. 다행히 나는 나이를 조금 먹은 것을 인정받아 다락방을 혼자 썼다. 비록 바퀴벌레도 나오고 쥐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납작한 작은 창문을 열면 누워서 하얀 달도 볼 수 있고, 30촉 전구가 있어 책을 읽거나 비밀 일기를 쓸 정도는 되었다.


집에서는 말수가 거의 없고, 없는 사람처럼 다락방에서 지냈지만, 학교에서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말도 잘하는 당찬 학생이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많이 웃었고, 친구들은 내가 좀 사는 집 자신감 있는 아이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학교에 가면 집을 잊을 수 있었고, 끝없는 상념을 멈춰줄 수 있는, 몰두할 일들이 많았다. 국어를 가르쳤던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도서부를 추천해 주셨고, 나는 늘 도서관에서 살았다.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교실 문을 열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종이 치면 혼자 조용히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읽었다.


어느 날 저녁, 아빠는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듯 하면서도 좋아서 말을 꺼냈다.

“해달이, 너 덕분에 연탄 100 장하고 쌀 한 가마니 나왔다.”

알고 보니 담임선생님께서 도시락 굶는 아이로 나를 명단에 올려 생긴 일이었다. 새엄마가 밥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일찍 학교로 출발해서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다. 새엄마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쌀을 아껴서 좋아했을 수도 있고, 동사무소에서 쌀과 연탄을 받게 되어 결과적으로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담임선생님이었다.

‘다 보고 계셨구나. 내 사정도 알고 계시나?’

어쨌든 그날 이후로 새엄마는 화를 내며 도시락을 싸놓았고, 나는 여전히 아침은 안 먹었지만, 도시락은 들고 가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먹었다.


가을에 접어드는 어느 날 국어 수업 시간에 갑자기 시를 쓰라고 하셨다. 나는 하늘을 보다가 구름을 보다가 나의 옛‘엄마’가 생각났고, 잡을 듯 흩어지고 사라지는 구름이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용의 시를 썼는데, 며칠 뒤 선생님은 축제 때 시화전을 한다며 한 반에 한두 명의 시가 뽑혔다고 했다. 물론 너무 기뻤고 좋았지만, 시화전을 하기 위해서는 표구를 해야 했는데, 당연히 나는 돈도 없었고, 나의 새‘엄마’에게 말을 하기도 곤란했다. 하필이면 그 시가 나의 옛 엄마에 관한 시였으므로.


“저. 선생님. 저는 시화전 포기할게요. 죄송해요.”

우물쭈물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차마 내 사정까지 말하기는 힘들었다.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 쪽으로 가시더니 커다란 액자 하나를 꺼내 오셨다.

“해달이 니꺼는 요 있다. 하도 잘해서 쌤이 샘플로 이미 해놨다. 전시회 끝나면 줄 꺼구마. 봐라. 멋지재? 시 참 잘 썼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냥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은 휴지를 떼서 건네주셨다.



- 에필로그: 나의 중학교 생활은 감성 가득했다. 웃음, 눈물, 아픔, 사랑, 우정. 그 외에도 모든 순간순간에 붙여질 다양한 감정과 제목들이 이었다. 마냥 아프지마는,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고 기억되는 나의 사춘기 시절. 오히려 행복하고 평화롭게 기억되었던 이유는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나를 자신감 있게, 때로는 멋을 낼 수도 있게 감싸주고 손을 내밀어준, 내가 만난 소중하고 따뜻한 시선들. 나를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준 학교, 그리고 선생님들. 지금도 그 누군가에게 결단코 필요한.

keyword
이전 11화어제 슬쩍 꺼내 본 -열세 살 소녀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