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로 다가온 소녀
계절에 맞지 않게 찌뿌둥한 하늘 밑으로
서글픈 바람에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칼에
지금 나는 이렇게도 방황합니까.
인생의 어디메에서 있길래
바로 발밑으로 전해오는 파도 소리와
귓전을 때리는 바람에 몸서리칩니까.
금세라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하나가
되고 싶음에도
지금 나를 이렇게 묶어두는 것은
또 하나의 절망입니까.
처절하게 흐르는 눈물을
저 파도 속으로 던져야 함은
내가 무엇의 구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까.
이제 나를 평온하게 할 무언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J라는 소녀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빠알간 입술
별빛처럼 곧 떨어뜨릴 것만 같은 눈망울
하아얀 겨울 속에서 떨고 있는 그녀는
더욱 더 어여쁜 장미꽃 빠알간 꽃잎
그녀로 인해
나는 울 수 있었고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려 버린 뒤
문득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애처로운 듯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나로 하여금 슬프게 했습니다.
내가 그 빠알간 꽃잎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던가.
너무도 미안해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끝을 흐렸던 나
J 라는 소녀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그녀의 가슴에 파묻혀 나는 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아직은 십일월 이십구일이랍니다.
십일월의 마지막은 아직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시간 속에서 행동을 만들어가고
있을까요.
양심이란,
어차피 그들 역시 웃으면서
착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굳이 괴로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윤동주의 서시,
그 속의 그런 결벽 따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나는 사회 속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것입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연하고도 자연스레
끊임없이 나는 생겨나고 있습니다.
야릇한 기분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양심에 호소하고 있는 나,
그러면서 현실 세계에서는 비양심적인 나.
그래요,
앞으로는 더 많은 결단력이 필요하겠지요.
시시각각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음,
적자생존의 원칙 그 아래 처참하게 소멸할 테니까.
죽은 자의 이름은 잊힙니다.
남은 자만이 존재의 가치를 즐길 뿐.
당신은 그래서, 살아야 합니까.
존재를 택하겠습니까.
신은,
영원한 존재.
그는 적자생존 따위가 의미가 없겠죠.
운명적으로 그는 신이니까.
바람이 매섭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고 그 혹독한 바람에
조금도 떨리지 않는 저 우뚝 자리 잡은 달 속에.
그제서야,
나는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또다시 그리워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마치 늘 그랬고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슬픔,
달빛처럼 차가운 슬픔. 슬픔의 목소리. 눈빛. 속삭임.
웃고 있는 슬픔,
미소 짓는 슬픔,
미소 지으며 울고 있는 슬픔,
그리움으로 다가온 씁쓸함의 슬픔.
시를 읊어요,
가엾은 소녀여!
무엇이 가슴속에서 머뭇거리고 있나요.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결정지을 때가 온 것이 아닌가요.
자아.
눈을 감고 차분히 떠올려 보아요
선택한 길의 어디메쯤을.
시를 읊어요,
가엾은 소녀여!
당신은 고민하고 있겠죠.
어찌할 바를 몰라 하겠죠.
조급하게 생각 말아요.
한참을 가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올 건가요.
차분히 생각해 보아요.
당신의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미래를,
겁부터 낼 건가요.
용기를 내요,
작은 소녀여!
이제는 세상의 눈도
어떤 것도 의식하지 말아요.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야만 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세상 사람들,
아무리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해도
그것의 첫 출발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글쎄,
아직은 잘은 몰라요
아직은 소녀이고 싶고.
하지만 여전히 두려워요.
다가오는 미래가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됨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에도,
나는 무감각합니다.
무언가 몰두해 버리면 간혹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야 그 소리를 인식합니다.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윽하고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 지금 내게
필요합니다.
언제나 당신은 냉정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있었을까.
한번을 마주치기 위해
그토록 많은 기대를 했는데
당신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마음이 얼어 버렸습니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아니 바라보지 못한 채
아니 오히려
경멸의 시선을 서로에게
던지고는 바로 걸어갔습니다.
감정의 요동침을 들키려 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차분한 발걸음으로 앞을 보았고
경직된 듯한 인상마저 남겼습니다.
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만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은 어떻습니까.
늘 그렇습니까. 당신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내게 향해서는 말을 해주십시오.
나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느끼고 있습니까.
얘기를 하나 할게요.
옛날, 옛날 아주 아주 까마득한 먼 옛날
보미와 가을이가 있었대요.
보미는 가을이를 몰랐고,
가을이도 보미가 노군지 몰랐어요.
잎이 떨어지던 어느 날
가을이가 그 나뭇잎 떨어지는 것에
너무, 너무 슬퍼서 울고 있었답니다.
그때 누군가가 속삭이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요, 바람은
가을이에게 속삭여 주었어요.
낙엽은
슬프지 않다고요.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푸르른 초록빛을
마음껏 물들였다고요.
그리고 다시 겨울이 지나면
이렇게 가을이처럼 나무를 사랑하는
보미라는 소녀가 있다고요.
가을이는 생각했답니다.
보미란 아이는,
보미란 소녀는,
틀림없이 예쁘고 착한 천사 같은 아이일 거야.
가을이는 보미란 소녀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해 가을이 다 갈 때까지도
낙엽을 바라보며 기다렸답니다.
겨울이 왔고
가을이는 너무도 춥고 힘이 들어
아파하고 있었답니다.
그래도 가을이는
보미를 만나기 위해 견뎠고
이내 그 무시무시한 겨울이 가고
보미란 소녀를 보게 되었을 때
가을이는 이미 쓰러져가고 있었답니다.
보미는 풀빛 냄새를 가진 아이,
보미는
싱긋한 풀빛 내음새
푸르름을 준비하는 옅은 풀빛 어린싹
하지만 온통 풀빛으로 물들여진
보미의 세계
가을이는 행복했답니다.
보미를 보기 위해 기다린 것은
역시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보미의 풀빛을 보게 된 것도
보미를 보기 위해 기다린 그 겨울의 의미가
또한 소중했기에
가을이의 영혼이 봄빛 풀잎에서 이슬이 되어갈 때
보미는 속삭여 주었어요
자연은 거짓말하지 않아
모습은 달라도 진실은 그대로인걸
그 뜨겁던 활기찬 여름이 지나면
마치 모두가 안녕인 마냥
잎들은 떨어지지만 그래서 여름은 가을에게
더없이 미안해하고
가을의 모습을 슬픈 모습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내 겨울의 매서움
차가움 냉혹함이라 사람들은 생각하지.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는
자연만이 알고 있는 따뜻함이 있는 게야.
풀빛 내음새를 준비하는
봄이 온다는 것을.
함께 있을 수 없지만
늘 함께였는걸
단지 모습이 달랐을 뿐
어쩌면 가을이는 다음 해의 여름을 위해
있는 거고
보미도 그 여름을 준비하기 위해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건지도 몰라.
결국 둘은 늘 함께였던 게야.
앞으로도 그런거고
어제나 지는 꽃은 새로운 아니
본래의 모습에서 더욱 성숙한 모습의 꽃을
만들곤 하지.
가을이는 보미의 말을 듣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웃음을 머금고 행복한 눈짓으로.
이야기는 행복하게 하지만 여전히
슬프게 끝을 맺었답니다.
슬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