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지혜는 행복의 영양소 (9. 아버지가 겪으신 )

(아버지가 겪으신 6.25 전쟁)

by 종구라기

1970년대 국민학교 시절, 우리는 참 많은 반공 교육을 받았습니다.

6.25 전쟁, 무장공비, 이승복 어린이 사건…

북한군은 마치 뿔 달린 도깨비처럼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 강당에 모여 보던 6.25 전쟁 관련 영화 속 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상당한 우리 군인이 중공군에게 끌려가다가 눈 덮인 길가에 푹 쓰러집니다.

중공군이 발로 차고 총부리로 등을 찌르지만 미동도 하지 않자, 죽은 줄 알고 버려둔 채 떠나갑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군인이 바로 제 아버지였다는 것을.


아버지는 1949년에 군에 입대하셔서, 공비 토벌 작전과 6.25 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1950년 6월 26일 백석천 전투에서 2사단 25 연대 2대대 분대장으로

분대원과 함께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를 향해 박격포를 명중시켰지만 탱크는 잠시 멈추더니 계속 남하하였습니다.

공식 전사 기록에는, 그 탱크가 박격포를 맞고 후퇴했으며 분대장은 전사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대장이 바로 아직 살아 계신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셨고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셨습니다.

첫 번째 포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중공군과 일본어로 대화를 하며 신뢰를 얻으셨고

눈 덮인 산사에서, 어수선한 틈을 타 부대원들과 함께 탈출하셨습니다.

하지만 곧 또다시 포로가 되셨습니다.

중공군은 아버지의 군화를 빼앗아 갔고, 아버지께는 해진 신발을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심한 동상에 걸리셨고, 눈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북으로 끌려가시다가 결국 기력이 다해 쓰러졌습니다.

총부리로 찔리고 발로 차여도 꿈쩍 않으시니 죽은 줄 알고 중공군은 아버지를 버리고 후퇴했습니다.

그들이 떠난 뒤,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기어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의 한 민가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 홍재운 학생과 그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셨고, 참혹한 전쟁 속에서 따뜻한 사랑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이후 군 의무대로 후송되었는데, 아버지의 양쪽 발가락은 동상으로 이미 괴사 상태였습니다. 당시는 의약품이 부족했고, 군의관은 마취도 하지 않고 펜치로 양쪽 발가락 한 마디씩을 잘라냈고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1951년 7월 15일, 중상이용사로 명예 제대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60여 년 뒤. 아버지를 도와주신 홍재운 님을 수소문하여 찾아뵈었습니다. 그분 부부와 재회한 자리에서 부모님은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대 후, 상이용사들이 가게에서 술주정과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 그들과의 교류를 끊으셨고, 시골에서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셨습니다.

제대 후 약 50년이 지난 2000년, 지인의 소개로 보훈 제도를 알게 되었고, 양 발가락 절단으로 국가유공자 7급 판정을 받으셔서 뒤늦게 연금을 수령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일찍 국가유공자가 되셨더라면, 매월 연금 수령과 의료비 지원, 전화 요금 감면, 자녀들의 초중고 및 대학 학비 면제, 자녀 취업 시 가점 등 다양한 혜택을 받으실 수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혜택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겪으신 6·25 전쟁 이야기는 직접 자필로 남겨 17매 분량의 수기에 담겨있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더 생생하고 처절하게 경험하신 아버지의 기록입니다. 2011년 6월 17일, 국방일보 6·25 기획 특집에도 아버지 기사가 실렸습니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손자 손녀들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체험이 아니고, 수많은 아버지들이 겪었던 역사입니다.

그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 땅에 전쟁 없는 세상,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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