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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rplate Jun 30. 2024

바이브

방 구석구석 집안 곳곳을 야무지게 헤집고 나서야 소파에 앉았다.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다. 켜놓기만 하고음소거를 해둔다. 사실 음소거를 해놓았음에도 내겐 TV가 꺼진 상태와 같다. 관심이 전혀 가지 않는다. 노트북을 켠다. 절로 손가락이 키보드로 향할 때 글쓴다. 글쓰기는 일상, 그리고 삶이 되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집에 있을 땐, 글쓰기, 독서, 요리, 명상, 스트레칭만 해도 적적할 틈이 없다. 


내 정신이 맑을 수록, 평온할 수록 청소는 또 얼마나 야무지게 하는지. 지금 사는 집은 작고 코지해서 청소하는데 무리가 없다. 사실 사람 사는데, 나의 경우 집 안에서의 동선이 길지 않다. 내 방 그리고 거실, 부엌은 그런 날 닮았다. 동선이 짧고 빠릿하고 콤팩트하다. 


내가 머무는 집이, 잠자고 먹고 씻는 나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인데 이곳에서의 머무름이 편안해야 일도 잘 풀린다. 내 방의 상태는 내 정신과 마음의 상태이자 마음가짐이자 태도다. 공간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마치 영화관 스크린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파노라마처럼 보듯 바라봤다. 충분히 단출한데도 비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무어람. 빳빳하게 잘 말려 개놓은 레오파드 수건도 보인다. 책도 보이고 서큘레이터도 분주히 성실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다. 러그도 깨끗하고 내 취향의 도자기 컵도 보이고...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엇일까. 실재하는 것일까.


비오는 토요일 밤의 고요와 고독이 이토록 낭만적일 수가 없다. 고독과 낭만은 다르지 않다. 둘은 하나다. 


바이브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Vibe. 영어사전엔 분위기, 느낌, 낌새 정도로 나와있다. 사람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분위기. 바이브다. 그 사람만이 가진 독특한, 고유의 분위기. 바이브. 아우라, 매력과도 같다. 


어제 누군가로부터 겉바속촉 같은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 왈, "초아씨를 처음 딱 봤을 땐 카리스마가 확 느껴지는데, 말을 해보면 따뜻하고 촉촉해서요."


얼굴의 예쁨이 아닌, 내면에서 나오는 빛이 외면으로 확장되는 그 특유의 아름다움. 분위기. 아우라를 가진 사람으로 나이들어가고 싶은 바람이 있는데, 겉바속촉.이란 말이 내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포스라는 건, 카리스마라는 건, 내겐 강함이나 쎈언니의 바이브가 아닌, 눈동자와 눈빛의 반짝임, 맑음의 결정체라고 생각해서다. 짙은 화장이나 화려함이 아닌, 내면에서 나오는 순수와 기운이랄까. 


지난 번엔 우연히 인사를 나눈 자리에서, "눈이 참 맑으세요. 눈이 맑고 깨끗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 내가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가 눈빛인데 처음 본 사람에게 이 말을 듣다니, 게다가 그녀 또한 처음 본 사람에게 눈을 말할 수 있는 건, 그녀 역시 눈의 기운을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녀와 대화 했는데, 그녀는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아이들의 눈을 보면 맑잖아요.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같은 맑은 눈을 가진 어른들을 보면 느껴져요!"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 크게 공감했는데, 나는 눈이 맑다.는 말, 언제 들어도 기분좋은 말이라고 답했다. 최근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다. 


얼마 전에도 카페에서 여러 명이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한 친구가 대화 도중 내게 "혹시 지금 렌즈 낀거에요?"라고 물었다.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보는데 눈이 반짝여서요. 눈에서 빛이 나요. 예뻐서 계속 쳐다봤어요."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내게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다고 화답했다.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딧불이의 빛처럼 반짝반짝이는 사람이라면, 그걸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 내면의 성장 그리고 내면의 빛을 아는 사람일거라 생각한다. 


그 바이브란, 그 사람이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디에 다니는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 가진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져온 사람인지. 그가 가진 사유의 시선의 높이에서 나온다. 무엇을 가진 자가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 진짜는 그 자체로 빛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다. 그런 앎에서 오는 넉넉함, 충만함이 여유라는 이름으로 외면으로 뿜어져 나온다. 


나이들어갈수록 때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눈이 되었으면 한다. 때로는 진중한 모습이면서도 웃을 땐 천진난만한 순수한 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나이들어가길 희망한다. 그러려면 마음이 맑아야겠다. 


곧잘 찾아보는 사진이 있다. 

쇼펜하우어와 보들레르의 사진이다. 


그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목구비, 옷 이런 것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흑백사진이다. 


내게 보이는 건 오직 

명징하고 선명한 그들의 눈.이다. 


눈빛, 눈동자가 이토록 명징하게 사람을 홀릴 수 있을까.정도의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 분위기. 카리스마다. 


압도적이다. 그럴 수 있는 건, 사색으로 점철된 앎, 통찰 때문이 아닐까. 


닮고 싶은 눈이다. 그들의 눈에게서 나는 빛을 본다. 


얼마나 영혼이 맑아야, 순수해야 저런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질문하게 한다. 


파리의 우울을 읽다, 

보들레르의 사진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맞춤했다는 설명이 적확한데, 

보들레르와의 눈맞춤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한걸까. 기대했을까. 


어느순간부터 사람을 볼 때, 

외모, 이목구비, 예쁜지 아닌지, 잘생겼는지 아닌지, 옷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해서 외모가 외면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내면만큼이나 외면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다. 내게 외면이란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치장되거나 둘러싸인 외면이 아니라, 분위기, 아우라.의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생각, 스토리, 메시지, 취향, 태도, 상냥함, 목소리, 말투... 

이런 것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느 시점부터 그리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의 눈.에서, 눈빛에, 눈동자의 맑음에 호감이 간다. 

눈빛이 맑고 빛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내면이 맑고 순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눈을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을 본다.

눈동자를 통해 그 사람의 순수를 본다. 

눈빛을 통해 그 사람 내면의 빛을 본다. 


보들레르의 선명한, 명징한, 강렬한 눈빛.은 그가 가진 내면의 힘.일 것이다. 

어떤 수준이어야지, 어떤 정도의 내면의 깊이어야 보들레르와 쇼펜하우어의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어려운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들처럼 단단하고 굳은 사람이 되고 싶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다행히도 낯빛이 환하다. 

눈동자를 보고선 내 눈과 거울 사이의 간격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내 눈빛의 안녕을 살폈다. 


이목구비가 예쁘고 아름답고 화려하면 그 또한 아름다운 복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경우, 정확하고 단순한 미.보다는, 평범해도 뛰어난 미인은 아니어도 내가 가진 매력.으로 나만의 분위기. 아우라로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나이들어서일까. 

무튼 조촐하게 그렇지만 매력적이면서 어느 것하나 섹시하지 않은 신선한 영혼으로 존재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내 눈은 나라는 우주다.  

나의 세계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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