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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rplate Jun 28. 2024

사색은 24시간 영업중

집 근처에 도서관과 로컬푸드 직매장이 있다는 건 유리하다. 지금 사는 동네를 그래서 선택한 것도 있다. 도서관은 걸어서 10분이면 닿고 로컬푸드 직매장은 코 앞이다. 아침 일찍 책을 반납하고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서가들 사이 뿜어져 나오는 공기, 냄새, 바이브가 작은 낭만이다.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가 날 불렀다. "초아야, 나 여기!" 요로코롬 말을 거는 듯했다. 제목은 익숙했고 언젠가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었다. 오늘의 인연이겠고 너를 만나기로 한 것이 이미 예정돼 있었겠다.


도서관을 나오면서 풀밭 벤치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든다.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내게 말을 거는 듯 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도 너고 너도 나라면? 어김없다. 나의 잔잔하고 촘촘한 사색은 24시간 영업중이다. 


무튼 흰 나비의 춤은 아름다웠고 내게 질문을 던지고 떠났다. 


한창 아이팟이 유행일 때, 나는 앙증맞고 다양하고 컬러풀한 아이팟 케이스에 꺄악.한 적은 있어도 아이팟을 사야겠다거나,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무선 이어폰의 유행에도 나는 아랑곳 없이 길다란 흰색 이어폰을 기똥차게 야무지게 들고 다녔다. 이유는 같은 기능을 하는 이어폰이 있는데 무선 이어폰을 살 이유가 없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아이팟이 유행이었던걸까. 파리 살 땐, 메트호에서나 버스에서나 길을 지나가도 아이팟보단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다름도 아니었고 외려 무선 이어폰의 대세 속 유선 이어폰이 개성있어 보였다.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어 내 눈엔 유선 이어폰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 유선 이어폰을 잘 쓰다 고장이 났다. 흰색이라 떼도 많이 묻었고 낡게 되었는데 지지직하기도 그러다 아예 한 쪽 이어폰 소리만 들렸다. 내 기운이 변한 건지. 너의 기운이 변한 건지. 무튼 나와 이어폰, 각자의 역할이. 임무가 다했구나.했다. 놓아주며 이렇게 된 차제에 유선 이어폰을 새로 사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나 카페 안에서 어떤 공간에서 음악 듣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다, 이동하는 내내 무의식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 건 자유이나, 이어폰으로만 듣는 음악이 혹은 소리가 가끔 나를 잠식하고 있다는, 잠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경계하는 편인데, 그럴 땐 사색의 힘도 무뎌진다. 


이어폰의 사용이, 세상의 작용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현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느낌이랄까. 보통은 조절능력이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듣게 될 땐 기분좋음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사색과 사유, 질문을 방해하게 한다. 의식적이지 않게 되면, 깨어있지 않으면, 감정은 들쑥날쑥. 거대한 파도처럼 인다. 


한 번 꽂히면 조금 두꺼운 책이라도 촘촘하게 오며 가며 걸으며 블랙홀처럼 빨려든 그 책을 하루만에 다 읽어내려간다. 책이 당기지 않으면 읽지 않는다. 억지로 읽지 않는다. 책도 순전히 마음이 동해야지 읽는다. 나와 인연이 닿아야지만이 읽어진다. 책을 읽는 사람이 나일까.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책을 읽는 것일까.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것일까. 책이 나를 선택하는 것일까. 


이어폰을 끼지 않으면, 사색할 시간이 많아진다. 사색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건 질문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질문을 삶의 싹을 틔우고 생명과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 시간을 버스 정류장에서나, 지하철역에서나, 길을 가다가도, 약속 시간에 미리 가 기다리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독서의 시간으로 사용하면 또 따른 설렘과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만의 질서를 찾아나간다. 버스에서 40쪽 정도를 읽었는데, 도착지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내 눈이 책의 활자 속에 떼어지질 않는 걸 보니, 저녁이면 다 읽어 내려가겠다. 금요일 오후, 이미 낭만 한 스푼이 추가됐다. 


작은 공원을 지나오며,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새들의 노래, 나비들의 춤, 내 얼굴과 몸을 감싸는 공기의 비쥬. 속삭임. 오늘의 하늘은 하얀 마시멜로가 수놓아져있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이 꿈이라 한들,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라 한들, 이토록 아름다운 현상들이 지금 여기 펼쳐져 있는데,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감동하지 않을 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재에 머무르면 고통과 괴로움의 실마리가 풀어진다. 현시도 순간순간 존재할 뿐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래서 삶은 순간순간이라는 것. 과거라는 허상을 있다고 착각하며 몸과 마음을 스스로 구속했던 속박했던 지난 날의 나는 없다. 지난 날의 나는 누구였던가. 기억일 뿐이다. 미래도 실체없는 환상, 꿈일 뿐이다.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 인식의 확장 이전에 내게 필요한 건 인식의 전환이었다. 나는 서른 후반이 되어서야 옳은 것을 옳다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걸까. 필연이다. 나는 알지만 알지 못한다. 

나는 모른다. 


확실한 건, 의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사색의 과정이 직관적이게 된다는 점이다. 초아라는 이름을 생각하면서도, 초아가 과연 나일까. 개념화된 대상일 뿐이지 않나.에서부터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로까지 이어진다. 여전하지만, 나의 대답은 모른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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