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의 잔상과 아이의 웃음 사이에서, 나는 책을 택했다
나는 한동안 넷플릭스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학교폭력의 잔상들이 아직도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더 글로리 진짜 재밌어.”
“완전 사이다야, 꼭 봐.”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나도 용기를 내어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순간순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통쾌해야 할 장면일수록, 나는 더 작아졌다.
이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이 반응하는 순간들의 연속들.. 명치끝이 계속해서 답답했다
숏츠의 알고리즘들이 날 괴롭혔다.
한 번 끝까지 봤다는 이유만으로
내 화면은 비슷한 장면들로 가득 채워졌다.
폭력, 욕설, 복수, 피 묻은 교복.
사람들에겐 “사이다 장면 모음”이겠지만
나에게 그것들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기억 묶음”에 더 가까웠다.
나는 그냥 멍하니 우두커니 서서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을 뿐인데,
알고리즘은 내가 이 장면들을 원한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더 많이, 더 자극적인 영상들을 들이밀어 줬다.. 중독이 된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화면을 바라보는 건지,
화면이 나를 쫓아오는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콘텐츠’ 일뿐인 장면들이
나에게는 끝나지 않은 어떤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이미 끝났다고 믿었던 일이
다른 사람들의 “넷플릭스 추천 목록” 사이에 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다시 혼자 과거로 밀려났다.
⸻
그런 나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다.
어렸을 적 선생님을 꿈꾸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독서지도사라는 꿈을 함께 꾸기 시작했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몇 달 동안 숙모 집에 얹혀 지내면서
사촌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맞벌이하시는 막내삼촌 작은 외숙모를 대신해
육아를 도왔다. 그리고 맞벌이 부부들의 고단함도 나는 직접체험을 하였다.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한 장씩 읽어주던 시간.
작은 장난에도 까르르 웃고,...
낯을 가리는 과정에서 나를 좋아하던 순간의 기쁨까지.
사소한 그림 하나에도 진지하게 집중하는 얼굴들을 보며
아이의 순수한 자유로움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기억력이 너무 좋다.. 그게 너무 부러웠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언젠가 아이를 낳아야 하나.’
비혼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놀고, 책을 읽으며
비록 내 아이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어린 날 한 구석을 함께 채워 주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큰 감동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감각이 나중에 “아이와 책을 잇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질 거라는 것을....
⸻
다시 본가로 내려오면서, 나는 또다시 방황하는 시기에 들어갔다.
익숙한 동네와 익숙한 방이 나를 맞아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더 낯설어졌다.
서울에서 품었던 꿈도,
숙모 집에서 느꼈던 양육의 기쁨도
모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독서지도사라는 꿈은커녕,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상상해 보는 일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쳐 있었다.
하루하루 무료하게 빠져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와 책상, 휴대폰 화면 사이를 느릿하게 오가는 것뿐이었다.
시간은 분명 앞으로 흐르고 있는데
내 삶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것 같은 기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멀어지고
대신 숏츠의 알고리즘이 머리맡을 차지한 날들이 이어졌다.
더 글로리의 장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비슷한 폭력 장면들이 반복 재생될 때면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흘려보낸 날들 사이에서도
이상하게도 책만은 손에서 완전히 놓지 못했다.
왜 책이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도,
페이지를 한 장이라도 넘기고 나면
‘그래도 오늘, 여기까지는 왔다’라는 생각이
나를 간신히 붙들어 주었다.
그리고 사회생활하면서 이상하게 책만큼은 놓고 있지 않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한 장, 한 장이 나를 다시 바깥으로 데려다 줄 줄은...
⸻
처음에 책은 그냥 도피처였다.
현실이 버거울수록, 나는 활자 속으로 웅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장들 사이를 떠다니던 질문이 나에게 와서 조용히 앉았다.
“나는 왜 이렇게 책을 붙들고 있을까?”
“내가 붙잡는 건 책일까,
아니면 상처 입은 나 자신일까?”
그 질문과 함께 조금 더 버티다 보니
아주 작은 상상이 하나 떠올랐다.
“아이와 나, 그리고 책.”
숙모 집에서 마주했던 아이의 웃음과
무료한 날들을 버티게 해 준 책장이
어느 날 한 줄로 이어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책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상처가 남은 아이에게,
책 한 권을 조용히 건네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선생님을 꿈꾸던 시절의 나는
교실 앞에서 분필을 들고 서 있는 나만 그렸다.
하지만 이제 내가 떠올리는 독서지도사는 조금 다르다.
책상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아
책장을 함께 넘겨주는 사람.
성적을 올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사이에 두고 마음을 들어주는 사람.
“공부해라”보다 먼저
“너도 이런 느낌이었지?” 하고 물어봐 주는 사람.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의 구분을 잘 구분해 내어 이끌어주고 싶고, 보듬어주고 싶다.
나는 알고 있다.
상처 입은 마음이 얼마나 쉽게 “콘텐츠”가 되어 소비되는지....
재밌는 드라마 한 편,
숏츠 몇 개로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이 가볍게 소환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누군가의 상처 곁에 서고 싶다...
그리고 그 조심스러움의 도구로
나는 ‘책’을 선택하고 싶다.
언젠가 학교폭력의 잔상 때문에
넷플릭스를 켤 엄두가 나지 않는 어떤 아이가
조용히 한 권의 책을 펼쳤을 때,
그 옆에서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어도 괜찮아.”
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어른으로
나는 그런 독서지도사가 되고 싶다.
아직 자격증도 없고, 경력도 없고,
몸도 마음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침대 위에서 겨우 한 장을 넘기던 그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을.....
더 글로리 속에서 작아졌던 내가,
아이와 책 사이에서
다시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펼친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이 작은 꿈을 또렷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상처받은 나와 아이,
그리고 그 사이를 조용히 잇는 책 한 권의 소중함을 믿으면서....
나만의 책갈피를 단단히 준비해,
그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선물해 주고 싶다.
Written by Diosori
Text & Images © Dios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