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팔색조의 지렁이 손질 행동
팔색조 부모는 지렁이를 손질해서 새끼들에게 먹인다. 이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고 관찰 데이터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논문 초고를 작성했고 교수님들과의 수개월간의 교정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가 교수님께서 준비가 된 것 같으니 학술지에 투고하자고 하셨다.
학술지마다 다루는 분야가 다르다. 과학 전분야를 다루기도 하고, 특정 과학 분야(예를 들어 생물학)를 다루기도 한다. 더 들어가 행동생태학과 조류학처럼 세부 학문분야의 결과물만 출간하는 학술지도 있다. 학술지마다 특성이 다르고, 종사자들의 인식도 다르다. 학술지를 영향력을 평가하는 다양한 지표가 있어 학술지를 고르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지수값이 낮다고 해서 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의 중요성이 낮다고는 볼 수 없다. 학술지가 출간할 논문을 고르는 기준에서 과학적 중요성도 있지만,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주제의 여부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분야의 종사자의 수도 일부 지표값 계산에 반영되기에 종사자가 적은 학문분야의 학술지는 그 값이 낮을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학술지를 고를 수 있게 해 주셨다. 팔색조 부모의 행동이기에 행동생태나 조류학을 다루는 학술지, 생물학을 다루는 학술지, 전분야를 다루는 학술지가 가능했다. 학술지의 영향력 지수는 전분야나 생물학을 다루는 학술지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조류학자로서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니 전통적으로 조류학을 다루는 학술지를 고르고 싶었고, 교수님께서는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조류학 학술지도 여러 개 있다. 독일, 미국, 캐나다 등 각 나라별 조류학학회가 있고, 그 학회에서 학술지를 출간하고 있었다. 조류학 학술지 안에서는 그 영향력 지수값을 보고 어느 정도 순위를 매길 수 있었다. 그 순위와 학술지에 실린 최근 논문을 보면 학술지가 요구하는 논문의 과학적 수준이나 내용을 예측할 수 있다. 만약 경험이 많은 과학자라면 거기에 맞춰서 제출할 수 있겠지만, 경험이 없는 나는 나의 논문 초고가 가진 내용을 매우 소중히 여겨 높은 학술지에 제출되길 기대했다. 그래도 너무 정신을 못 차린 것은 아니어서 제일 높은 곳부터 제출하진 않았다.
학술지에 논문을 제출하면 편집자가 먼저 확인한 다음 심사자(reviewer)에게 보낸다. 이 과정에서 편집자에게 편지 아닌 편지를 작성하여 보낸다. 편지에 연구 내용을 소개하며, 무엇을 발견했고, 왜 중요하고, 이 학술지의 목적과 잘 부합한다고 설명한다. 편집자는 편지와 더불어 제출된 초고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편집자가 논문의 내용이 학술지에 맞지 않거나, 그 중요도가 낮다고 판단되면 심사 없이 바로 거절한다. 그렇다. 나의 첫 시도는 편집자 단계에서 잘렸다.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제출했는데, 그에 비해 거절의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학술지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일정한 형식을 맞춰서 제출하길 요구한다. 그렇기에 다음 학술지에 제출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게 그림, 표, 참고문헌을 언급하는 방식 등을 고쳐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학술지에서 또 거절당했다.
긴장감은 줄었다. 후 이 정도쯤이야. 세 번째 학술지에 제출하기 위해 형식을 바꾸었다. 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또 거절당할 것을 걱정하여 고치기 싫은 마음이었다. 대학 수시 지원처럼 동시에 여러 곳에 지원하고, 뽑힌 곳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는 방식이 매우 그리웠다. 그렇게 영혼을 반만 켜서 형식을 바꾸고 다시 제출했다.
편집자가 논문을 보는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하루 길면 몇 주가 걸린다. 편집자가 바빠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내용이 애매하여 다른 동료들과 토론 후에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오래 걸린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출한 다음날부터 매일 홈페이지에 들어가 상태 변화를 확인했다. 앞서 두 학술지에서 빠르게 거절을 당했기에, 거절의 예상했고 아픔을 최소화하기 위해 '응~ 떨어질 거야' 최면을 걸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확인할 때마다 심장은 콩콩거렸다. 어느 날, 홈페이지에 들어가 로그인하니... 두둥... 심사가 시작됐다는 표시가 있었다. 편집자가 심사자들에게 논문 초고를 보낸 것이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헤벌쭉 웃었다.
장마가 시작된 여름, 연구실 동료들과 출장을 갔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띠링~"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학술지에서 동료과학자들의 리뷰가 끝났다는 내용과 함께 그들이 제안한 수정사항이 함께 왔다. 리뷰어는 학술지에 논문을 출간하기 전에 수정을 제안할 수 있는데, 수정사항의 정도에 따라 major와 minor로 나뉜다. Major는 실험을 다시 하는 정도의 규모가 큰 제안이며 수정 후에 다시 리뷰어가 그 내용을 확인한다. Minor의 경우는 간단한 내용이라 굳이 다시 리뷰어가 볼 필요 없이 편집자가 그 내용을 확인하여 통과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 major였다. 긴장하며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쉬워 보이는 내용도 있고 반영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제안도 있었다. 교수님과 상의하며 열심히 수정하여 여름이 지나 가을이 시작될 때 다시 학술지에 보낼 수 있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안타깝게도 학술지에서 바로 출간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 재심사 후에 리뷰어들은 minor 수정을 제안한 것이었다. 간단한 문제들이라 혼자서 수정할 수 있었고 빠르게 다시 학술지에 제출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 논문이 출간 확정됐다.
연구실 퇴근 후, 혼자 영화관에 갔다.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 집에 가서 맥주 한 잔 하면 딱이다 싶었다. 휴대폰을 켜니 논문 출간 전에 마지막 확인을 요청을 받았다며 교수님께서 링크를 보내주셨다. 맥주는 물 건너 간 상황이다. 생각보다 수정할 내용이 있었고 꼼꼼하게 살핀 덕분에 문제없이 논문이 출간됐다.
과학자들도 SNS를 한다. 대표적으로 researchgate가 있다. 자신이 어떤 연구를 하는지 소개하며, 논문을 올려서 공유하고, 서로 질의응답 하고, 메시지를 보내어 공동연구를 제안할 수도 있다. 너무 부러웠다. 바로 가입을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논문 없이 계정을 만들기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렇게 참고 버티어 논문이 나왔고, 누구보다 빠르게 계정을 만들었다. 자기소개를 적고, 논문을 올리고 유명한 과학자를 팔로우했다. 뿌-듯 :)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첫 논문의 의미는 논문 그 이상이다. 과학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다. 음악가의 첫 음반, 미술가의 첫 전시회, 저자의 첫 책이 주는 감동과 유사할 것이다.
대학원 3년 차의 겨울, 첫 도전을 무사히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