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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현 Jun 07. 2023

오픈 발코니

엄마의 사는 방법

엄마는 아침마다 클래식으로 오빠와 나를 깨웠다. 시디 몇 장으로 반복되는 음악들에 익숙해져 우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엄마는 잠 깨는 주사라며 손가락으로 우리 엉덩이를 콕콕 찔렀다. (어느 순간 많이 사라졌지만, 나 어릴 적은 감기로 병원에 가도 엉덩이 주사를 맞았다.)


하루는 엄마가 상기된 목소리로 “지현아 지현아 빨리 일어나 봐”라며 나를 깨웠다. 말도 없고, 매사 침착한 엄마가 호들갑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달려 나가 보니 베란다에 새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 베란다는 천장이 없는 오픈 발코니였다. 세상에 정말 이런 집이 다 있을까? 아침에 새가 들어와 지저귀는 집이라니! 나는 디즈니 전집에 나오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녀들은 항상 테라스에서 예쁜 새들과 함께 하니까 말이다.


이보다 더 좋은 건 겨울이었다. 눈 내리는 날도 어김없이 엄마는 나를 불렀다. 눈 쌓이는 베란다 복도의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카펫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안전하고 깨끗하게 눈 놀이도 마음껏 즐겼다. 나는 이렇게 희귀하고도 재미있는 테라스가 딸린 집에 살았다.     


https://princess.disney.com/snow-white


이 멋진 집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살게 된 집이다. 바로 엄마가 팥을 쑤던 그 더운 집.(이전 글언제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 아빠가 너무 오래 비밀로 하시는 바람에 우리가 이사 가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전해 들었다.(부모님은 어린 오빠와 나에게 유독 어른들의 이야기를 가리셨다.) 헤어짐이 익숙하지 않을 나이었지만, 새로 지어진 집으로 이사 간다는 설렘이 내 슬픔을 다독여 주었다.


잔소리가 없는 엄마가 이사를 앞두고 약속 하나 하자고 하셨다. 주방에 아직 창문이 없으니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3층 꼭대기인데 주방 맞은편 큰 창엔 유리 대신 비닐이 붙어있었다. 한 술 더 떠 베란다도 샷시가 없어 야외나 다름없었던 것이다.(sash보단 샷시라고 발음하는 게 제맛이다.) 요즘엔 일부러 오픈 발코니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폐쇄 베란다가 일반적이었다. 사실 내가 사는 집은 새로 지어진, 오픈 발코니가 딸린, 디즈니 스타일의 집이 아니라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집이었다.     



다행히도 오래가지 않아 주방 창문과 베란다 샷시는 제 모습을 갖추었고, 불행히도 내 키가 좀 더 자라는 바람에 내가 멋진 집에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엄마 아빠는 주방 창문이 되고, 베란다 샷시가 되어 오빠와 나를 지켰다. 현실엔 무지한 채, 종종 찾아오는 새와 눈 내리는 겨울에 흠뻑 빠진 순진함. 그리고 부모님은 그 천진난만함을 정성스럽게 보존해 근사한 추억을 만들어주셨다. 더 중요한 건 환경에서 오는 불편함을 기분 좋게 전환하는 법을 전수해 주셨다는 거다.






감사하게도 신축 아파트에서 신혼을 보냈다. 남편이 퇴근하고 주차장에 들어서면 차량이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나는 알람을 듣고 밥솥을 열어 식사를 차렸다. 유모차 끌기와 짐 싣고 내리기에 최적화된 경사도로와 동선 덕에 약해진 손목을 지킬 수도 있었다. 강한 바람에도 미동조차 없는 두터운 창, 깔끔한 쓰레기 장 등 그 당시 모든 것이 최신식인 시스템에 길들여져 주거지의 불편함은 겪어 본 적 없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2년 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구축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때 마침 <응답하라 1988>이 한창 방영 중이었는데, 꼭 그 시절로 시간여행이라도 간 기분이었다. 바람 부는 밤 덜컹거리는 나무 창문은 사운드와 온도로 날씨를 생중계해 준다. 지상의 야외 주차장은 한술 더 떠 이레를 안고 꽃가루, 눈, 비, 바람과 씨름하게 했다. 매주 월요일이면 주차장에 산꼭대기처럼 높이 쌓이는 재활용 덕에 괜한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일주일에 한번, 새벽부터 아침까지 재활용을 모은다.)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거주지가 바뀌니 삶의 질이 한없이 떨어지는데, 뭐랄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질은 더 톡톡해지는 기분이었다. 차량 도착 알림 대신 베란다 창에 얼굴을 빼꼼 내밀고 남편 차가 들어왔나 확인한다. 그러다 옆 라인 사는 하늘이 엄마도 보고, 들어오는 택배차를 보고 시원한 음료도 미리 준비한다. 구축 아파트의 특징 중 하나는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짧게 5-6단 정도의 계단이 더 있다는 것이다. 이 계단이 유모차를 끄는 아기 엄마들을 무척 괴롭게 했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달게 받는 외출시간도 새로웠다.


차에 타고 내릴 때마다 온몸으로 느꼈던 사계절의 변화는 집순이 엄마를 대신한 이레의 선생님이었다. 재활용 수거하는 날마다 쌓여있는 쓰레기는 나로 하여금 비닐 한 장 더 아끼게 각성하도록 해줬고, 이레는 책에서만 보던 커다란 집게 차의 움직임을 보며 우와 소리를 연거푸 해댔다. 끼익 소리 나며 무디게 닫히는 방문 덕에 멀쩡했던 이레의 손가락도 감사한 조건 중 하나다. 이러한 불편함들이 내 마음을 편케 만들었던 건 엄마 방식의 '사는 방법' 덕분이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부분 어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다. 아이들의 표정과 행동 역시 그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것이다. 표출된 말과 행동은 생각과 동일해질 때가 많다. 더욱이 감정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아이들의 눈과 귀에 또 온몸에 날마다 씨를 뿌리고 산다. 이것들이 모여 한 인간의 '사는 방법'이 된다. <이 세상의 좋은 건 모두 주고 싶어>라는 노래 제목처럼 감사와 행복, 인정이나 자신감, 사랑과 관심, 성찰과 성취 등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들이 많다. 누군들 아니겠는가.


하지만 완전한 인간은 없고 완전한 부모는 더욱이 없기에 고르지 못한 씨앗을 뿌릴 때도 많다. 불만과 분노, 자책이나 비교, 시기와 무시, 한탄과 상실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때문에 우리의 불완전함은 온종일 수고에도 스스로를 죄책감에 휩싸이게 만든다.(나를 포함한 엄마, 아빠들이 이런 이유로 불쌍하다.) 그래서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공부하고, 엄마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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