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지현 Jul 12. 2023

이제는 터미널에서 울지 않는다.

홀로서기

70이 넘은 할머니가 90 넘은 엄마에게 “엄마 나 노인대학 갔다 올게요” 얘기하니 “우리 아기가 왜 벌써 노인대학을 가니?”라고 했다던데, 나 역시 성인이 되어도 엄마의 아기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스무 살이 지나도 엄마만 보면 계속 혀 짧은 소리가 났다.


요동은 없지만 한 번 상한 감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엄마는 잠만 자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나에게 고마워했다. 엄마에게 혼나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엄마 까꿍” 하는 헤픈 스타일이었다.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눈에 훤히 그려지게 조잘조잘 이야기 잘하는 나와 말 없는 엄마는 단짝이었다. 나는 말하느라 재미있고, 엄마는 들으면서 즐거워했다. 다 컸는데도 엄마 쫓아 나가고, 엄마 나가지 말라 붙들고, 엄마 언제 오냐 기다리는 껌딱지였다. 그렇게 엄마와 붙어살다 대학에 가면서 처음 엄마와 떨어져 외할머니 집에서 오빠와 함께 지냈다.




나랑 친오빠는 어릴 때부터 쌍둥이란 소릴 종종 들었다. 둘이 닮았고, 키가 비슷하다.(오빠 미안) 서로 남고와 여고 다니던 시절을 제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대학원 모두 동문이다. 심지어 같은 전공에 같은 부전공, 대학원은 동기다.


학교에선 사람들이 오빠 보곤 ‘머리 짧은 강지현’이라고 했고, 나에겐  ‘긴 머리 강00’ (오빠이름)이라고 했다. 오빠와 내가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교수님들은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면 결혼 못 하니 떨어져 앉으라고도 했다. 내가 맨날 오빠 쫓아 수강신청을 하고, 옆에 앉아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다. 3살 차이 나는 오빠를 이겨먹으려고 한다고 다들 오해했지만, 난 오빠를 좋아하고 많이 따랐다.


우리는 수강신청 기간이 다가오면 전략을 짰다. 월요일은 수업을 아예 빼든 지, 최대한 늦은 시간의 수업을 신청했다. 금요일은 가장 빠른 시간의 수업을 신청했다. 우리 전공에는 전 학년이 매 학기 들어야 하는 전공필수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이 항상 말썽이어서 금요일 오후나 월요일에 잡히면 우린 너무 우울했다. 어느 날 오빠가 학사규정을 보다 문제의 그 과목을 한 학기 안 들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빠가 교학실을 몇 번 들락날락하더니 그때부터 7학기만 이수하면 되는 수업이 됐다. 꼰대 같은 선배들은 괘씸해 했지만 그렇게까지 해가며 주말을 길게 길게 만들었다.


그렇게 금요일 땡 하면 집으로 갔다. 엄마에게 엄했던 외할머니는(이전글) 오빠와 내가 여전히 그리워하고 존경하지만, 당시는 정말 불편했다. 집에서도 예절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누워서 TV도 못 봤다. 잠옷 입은 채로는 아침도 못 먹었다. 할머니가 불편해 주말마다 집에 간 건 아니지만, 편한 날들이 필요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있는 집에 가는 시간은 항상 좋았다. 보통 오빠 차를 타거나, 서로 일정이 다르면 기차나 고속버스도 타고 다녔다. 그렇게 4년 반을 줄곧 왔다 갔다 했다.




집에 가면 혀 짧은 아기가 되었다가 서울에 가면 아가씨가 되는 날들을 반복하다 대학원생까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도 시작했다. 자연히 주말을 늘려 만끽하던 아기 놀이가 끝났다. 그래서 내 방에 있던 모든 짐을 할머니 집으로 옮겼다. 엄마는 모든 서랍이 텅 비어 소리가 광광 울리는 내 방에서 울었다. 일을 시작한 첫날 퇴근하고 들어온 나는 혼자 라면을 먹다 울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어쩌다 집에 내려가는 날이면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 입을 오므려야 했고, 헤어지는 터미널과 기차역에선 엄마랑 나랑 떨리는 입술을 붙잡느라 바빴다. 둘이 평생을 붙어있었는데 뭐가 그리 서운하다는 건지 울고 또 울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날엔 각자 차에서 울고, 기차에서 울었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을 보내는 아기와 엄마처럼 그렇게 울어댔다.


어설프지만 나의 홀로서기의 시작이다. 오빠는 곧 결혼해서 할머니 집을 떠났고, 할머니는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집에 와도 쉴 수 없었다. 어디에도 마음 편한 공간이 없었다. 어딘가에 손 하나 의지해서 서있고 싶은데, 엄마는 없었다.


그래서 그때의 내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재미있자고 하는 동아리에서도 분주하고, 동료의 한스러운 이야기에 공감할 여유도 없었다.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에 비칠 물기조차 없는 퍼석퍼석한 상태. 그렇게 휘청거리긴 해도 엄마, 아빠가 차곡차곡 쌓아둔 마음의 기초가 튼튼해 쓰러지진 않았다. 덕분에 다시 수분을 끌어올리며 혼자 서있는 법을 배웠다.




나의 홀로서기는 비웃음 사기 딱 좋은 어리광이지만 남편은 달랐다. 남편은 누나와 남동생 사이의 둘째다. 부모님을 모시느라 귀향한 아버님은(나의 시아버지) 못다 이룬 꿈에 아쉬움이 참 크셨을거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삼 남매를 부족함 없이 키우셨다 들었다. 큰 딸과 둘째(남편)를 유치원 때부터 도시로 보내시기도 했다. 그래서 남매가 주중엔 외할머니와 있고, 주말에만 잠깐 집에 있었다.


남편이 살던 집 근방엔 여객선과 화물선이 다니는 항구가 있었다.(지금은 어선만 있다.) 할머니 집에 가기 위해 일요일 오후가 되면 5살 배기였던 남편은 누나 손을 잡고 배를 탔다. 그래서 일요일 점심만 먹으면 다운되었던 기분이 지금도 느껴진다고 한다. 엄마가 그리운 아기는 주중에 엄마가 잠깐 오는 날이되면 한참 전 부터 창문에 매달려 아빠 차의 헤드라이트 모양을 찾느라 눈이 바빠졌다. 그러고도 집에 가는 토요일만 하염없이 기다렸단다. 어쩌다 날이 궂어 배가 안 뜨는 날은 도선장에서 엉엉 울면서 누나랑 할머니 집으로 되돌아갔다.


지금도 시댁에 가면 그곳을 가끔 지나친다. 누나 손잡고 울고 있는 아기가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지금도 부모님을 많이 그리워한다. 대화하다 입술에 힘이 들어간 채 가끔 생각에 잠긴다. 말 안 해도 안다.




성경에 보면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구절이 있다. 나는 그렇게 부모님을 떠나 홀로 서고, 남편은 조금 더 일찍 홀로서기를 배우다 둘이 만났다. 헤어지긴 싫고 갈 곳은 없어 집 앞 계단에 앉아 이야기하다, 그 시간들이 길어져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됐다. 새로 생긴 단짝.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첫 번째 시간이 나의 유년기라면 두 번째는 남편과 연애하던 시간이다.)




남편이 준 유치한 인형 둘





그리고 그제야 엄마와 내가 헤어질 때마다 반복하던 청승이 멈췄다. “너 결혼하니 이제 헤어져도 아무렇지도 않다.” 엄마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얼마 전 엄마가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작은 엄마. 터미널에서 만난 엄마는 여전히 반갑고, 헤어질 때도 덤덤하다.




이전 04화 불편한 얼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