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지현 Jun 09. 2023

대패삼겹살

가림의 미학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우리 집엔 특이한 문화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 늦은 오후가 되면 네 식구가 목욕탕에 간다. 한 주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나 보다. 남자들은 빨리 씻으니 1시간이면 족하지만 여자들은 2시간도 모자라다. 타협점을 찾아 항상 1시간 40분 후에 목욕탕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다. 바가지 두 개 겹쳐 둥실둥실 타고 다니기도 하고, 엄마 따라 헤어팩도 하고, 어설프게나마 엄마 등도 밀어주고 부랴부랴 나가면 어김없이 남자들은 서성이고 있다. 네 식구 모두 머리는 축축, 부스스하고 벌게진 볼이다.     



고민 않고 향하는 다음 장소는 ‘부부돌구이’다. 종잇장처럼 얇고 동글동글 말린 냉동 대패 삼겹살을 파는 집이다. 토요일 저녁이면 항상 만석에 고기 굽는 연기로 뿌옇던 가게 모습이 생생하다. 새까만 돌판에 순식간에 구워지는 고기와 파채, 요란하게 불판에 비벼 주는 볶음밥은 매일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여태껏 이해가 안 되는 건 깨끗하게 씻고 나서 왜 고깃기름과 냄새를 뒤집어썼나 싶은 거지만 30여 년 인생의 기억 중 손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추억이다.


둘째 아이를 낳고 우연히 기사 하나를 보았는데, 내가 살던 지역의 대패삼겹살 이야기였다. 적은 돈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그 지역의 특별한 음식이었단 내용을 보니 우리 가족의 지나온 삶에 각주 하나 달린 느낌이었다. 기사화될만한 이야기였던 걸 보면 우리 가족만의 추억은 아닌가 보다. 옛날 생각에 엄마에게도 기사 링크를 보내주고 둘이 낄낄 웃었다. 두툼한 소고기 대신 얇디얇은 삼겹살이 특별행사 메뉴였던 데는 까닭이 있었겠지만 지금도 대패삼겹살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시간을 재미있게 만들어준 엄마, 아빠 덕이다.


엄마는 늘 그랬다. 세상 물정에서 나를 보호해 줬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면서도 미안해서 못 보겠는 영화가 <인생은 아름다워>인가 보다. 엄마는 나의 매일을 예쁘게 또 재미있게 만들어줬다. 엄마는 좋은 그릇이 아니어도 뭐든 정갈하게 깨끗하게 담아냈다. 통 째 내놓은 반찬, 양푼이 비빔밥 같은 투박한 맛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어릴 때는 엄마가 포장 리본들을 모아뒀다가 내 옷 색깔에 맞춰 머리에 리본을 달아줬다.(그 시절에 깔 맞춤은 좀 특별했다.) 좋은 집에 살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은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우리 집을 좋아했다. 힘들게 가정을 꾸리면서도 억척스럽지 않고 고급스러웠다.(돈이 꽤 드는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서 배운 걸까 궁금하다가도 당연히 내 외할머니나 외증조할머니겠지 싶어 물어본 적은 없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구글 이미지 검색)



그렇지만 엄마가 매일 행복에 산 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엄마가 신문을 펴놓고 초점 잃은 눈으로 한참을 있었던 기억이 났다. 엄마가 종종 그럴 때면 어린 나는 “엄마 무슨 생각해?”라고 물어봤다. 그 일이 생각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니 전화기 넘어 엄마가 말한다. “너 밝을 시절에 엄마가 더 즐겁게 해주지 못했네, 미안해.” 그 시간 엄마에게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것을 대략 안다. 하지만 엄마의 감정이 나에게 괜한 불똥이 되거나 이유 없는 짜증이 된 적이 없는데, 엄마는 미안하다고 그런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상상한다. 내가 과거로 잠시 돌아갈 수 있다면, 수많은 나의 후회와 흑역사를 제쳐두고라도 가야 할 시간이 있다. 첫 번째는 무조건 어린 나를 키우는 지금 내 나이의 엄마를 찾아가 안아 줄 것이다. (두 번째는 다음 기회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내 고민을 삼키는 희생이기도 하다. 와르르 쏟아내 버리면 ‘고민’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와 뱉어낸 것들을 같이 마주하게 되니 말이다. 누구든 청소년기, 빠르면 1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엄마의 손으로 가려주던 현실을 직시할 만큼 키가 큰다. 어차피 큰다. 나도 얼마 안 가 키가 많이 커버렸다.(실제로도 많이 컸다.) 그동안 안 보였던 현실에 압도되어 방황도 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조금 더 크니 현실보다 더 큰 사랑이 보였다. 철듦의 입문 단계 인가보다.



요즘 많은 자녀교육 지침서들은 자녀에게 가정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을 오픈하라고 한다. 자녀들의 현실 관념을 위해서 일 것이다. 이런 대세 앞에서 우리 엄마는 구식이고, 엄마가 된 나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아주 작은 상처도 무거워, 보고 또 보다 잘 때까지 두 손으로 붙잡고 있는 아이들에게 ‘현실’은 견딜 수 없는 무게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이 빠르고 약았다 하더라도 그 나이는 여전히 순진하다.('요즘 애들은 우리 때랑 달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어른들이 하던 말이란다.) 그래서 나는 어린 자녀들의 철없음을 지켜주는 게 엄마 역할이라고 믿는다. 조금 더 가려주자. 가림의 미학이랄까?

이전 02화 오픈 발코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