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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햇볕 Jun 28. 2024

이렇게는 나도 못살아



상담대학원 진학은 쉽지 않았다. 

진학 준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무엇보다 주변 반응이 좋지 않았다. 

청소년소설 창작모임에서는 대학원 진학을 과한 선택이라고 여겼고 형제들은 관심이 없었으며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대학원 진학으로 힘들었던 것은 내 마음의 혼란이었다. 

급여를 받는 상담사로서 이론과 실제를 공부함이 마땅하나 당시 초등 저학년인 아이 둘의 돌봄 문제와 경제적 여건이 문제였다. 

스스로 생각할 때 이런 상황에서 대학원을 가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그럼 상담 시간에 활동지나 하는 것은 괜찮나? 

내가 너무 윤리적인 부분만 생각해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학원 진학 문제로 혼란을 겪을 때 지인이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힌트를 줬다. 

그 지인 역시 상담사가 되고자 상담대학원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어서 생업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좋은 대학원을 알려줬다. 

나는 힘을 얻어 남편에게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알아서 해.”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 말이 내게는 “나는 당신이 대학원 가는 것이 싫지만 근본적으로 선택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래서 서운했다. 

물론 남편은 나와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말려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진학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응원해 주기를 바랐다. 

응원은 이상적인 바람이라 하더라도 왜 대학원을 가려는지 묻기라도 해 주기를 원했다.

   


고민 끝에 나는 남편 말처럼 “알아서” 대학원 진학 준비를 했다. 

우선 학비가 전혀 없었다. 

이것 먼저 알아서 해야 했는데 난생처음 학자금 대출을 받기로 했다. 

도박이나 유흥을 하려고 대출받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무거웠다. 

내 이름으로, 나만을 위한 최초의 대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담사로 고정 월급을 받으니 갚아나가면 된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상담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대학원 준비를 하니 정신이 없었다. 

분신술이라도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힘들었지만 남편에게 알아서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같다. 

자, 봐라. 

네 말처럼 나는 알아서 한다. 

이렇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방에서 대학원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데 남편이 양말을 들고 와서 말했다. 

   

“내가 양말을 건조대에서 걷어 신어야 되겠어? 이렇게는 못 살겠어.”

   

생각해 보니 결혼 후 남편은 빨래를 갠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그야말로 “전업주부”로서 빨래한 양말은 짝을 맞춰 접어서 양말함에 넣어놓았었다. 

그러면 남편은 가지런한 양말을 꺼내 신기만 하면 되었다. 

남편에게 양말은 건조대에 있는 것이 아닌 양말함에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업주부를 그만둔 아내 때문에 손수 건조대에서 양말을 걷어 신어야 되니 매우 분노한 것 같았다. 

남편은 몹쓸 대우를 받은 듯 불쾌한 얼굴로 씩씩대며 거실로 나갔다. 

순간 머리가 댕 하고 울렸다. 


남편 말대로 나는 대학원 진학이나 살림이나 출근이나 내가 “알아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무엇을 알아서 하고 있나? 

나는 거실로 나가서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도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남편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양말을 미처 개지 못한 이유를 자분자분 설명했을 터였다. 

나는 내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 마음이 얼굴로 드러났던 것 같다.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해해야 하는 의미도 모르거나 관심 없는 대상에게 설명조차 아까웠다. 


나는 다시 방으로 가서 자기소개서를 마저 썼다. 

자기소개서를 다 쓰고 거실로 나오니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실 테이블에 깔끔하게 개어진 수건과 옷, 양말이 있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 

그 눈물은 안도와 슬픔과 회환, 분노가 뒤섞인 것이었다. 

남편도 이제는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복잡한 내 마음을 남편이 이해하려는 행동이길 바랐다. 

   


나는 대학원 면접까지 통과해서 대학원생이 되었다. 

낮 시간은 학교에서 상담사로 근무하고 퇴근 후 저녁과 토요일은 학생이 되어 상담 이론과 실제를 공부했다. 내 평생 이렇게 재밌게 공부했던 적은 없었다. 

몸은 힘들고 과제는 벅찼지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배우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물론 여전히 엄마이며 아내이며 며느리이며 딸이지만 대학원에서는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일 수 있었다. 나는 대학원 공부를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겼다. 

내 삶을 나름 성실히 살아온 나에게 주는 선물. 

상담대학원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명품 옷이나 가방은 아니었지만 선물이었다. 


남편이, 주변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여겨서 슬프고 분노했으나 누구보다도 나는 나를 몰랐다. 

상담 공부 출발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담대학원 공부는 내 마음에 등불을 밝히게 했다. 

그 등불에 의지해 깜깜한 앞을 비추며 나간다. 

두렵고 떨리고 불안한 삶에 용기를 내게 한 상담대학원 공부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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