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우울증이에요.”
첫 상담에서 내담자가 진단명을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나는 “우울증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게 되셨나요?”라고 묻는다.
상담에 오는 내담자 중에 몇몇 분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단을 받고 온다.
또는 인터넷 검색이나 미디어, 심리 관련 책에 나온 정신과적 증상과 자신의 경험이 겹치면 스스로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진단은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학적 전문 지식이 있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진단명을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우울증, 불안장애, 조울증, 공황장애, 강박증, 성격장애라서 이런 거야.
질병에 걸려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고통을 대할 때 조금이라도 낫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진단에 맞춰 증상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우울증이니까 우울이 있는 것이 맞다고 여겨서 자신이 곧 우울증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리상담사는 진단을 내릴 권한이 없기도 하지만 나는 진단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내담자가 우울증이라고 말해도 우울증에 방점을 두지 않고 내담자가 겪는 경험에 질문할 뿐이다.
진단을 받았다고 해도 마음의 고통을 해소하는 것은 별개다.
진단에 갇히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 때 나는 내담자의 마음을 엑스레이로 찍듯 확인할 수 있는 심리검사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얼결에 고등학교 상담사가 된 뒤에 학생 내담자를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참여할 수 있는 심리검사 워크숍은 거의 갔던 것 같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교류분석 워크숍이었다.
에릭 번의 교류분석은 대인관계와 의사소통에 대한 이론으로 집단 구성원들의 교류의 측면에서 상호관계를 분석한다.
교류분석이론에서 자아의 상태를 어버이 자아, 어른 자아, 어린이 자아로 표현한다.
어버이 자아는 정신분석에서 초자아에 대응되는 개념이며 어른 자아는 에고, 어린이 자아는 원초아에 해당된다.
어린이 자아는 순응적, 자연적이며 자유로운 특성을 나타낸다.
교류분석이론 워크숍 시작 전 검사지를 받았는데 자신의 자아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적극적인 자세로, 솔직하게 검사를 했다.
당시 워크숍을 받는 인원이 매우 많아서 몇 십 명이 되었다.
큰 원탁이 10개 정도 있었고 하나의 원탁에 5, 6명이 앉았다.
강사가 원탁 사이를 다니며 참여자의 검사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러다가 내 옆에서 멈췄다.
나는 내 자아 상태가 궁금해서 강사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
강사가 내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무슨 직업이세요?”
심리 관련한 상담사 교육에 무슨 직업이냐고 왜 묻나 싶었다.
내가 상담사라고 했더니 강사 눈이 동그래졌다.
“상담이 되세요?”
순간 교육장이 조용해졌다.
다들 나만 보는 것 같았다.
강사의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 뭐가 뭔지 몰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좀 창피하고 죄 아닌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만약 지금 나가면 교육비는 환불이 되나?
이걸 배워서 학교 상담에서 활용하고 싶다는 마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저런 말을 할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앉아있기로 했다.
원탁에 앉은 사람들은 어차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그들도 모른 척했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래서 다행일 때도 있다.
교육이 다 끝나고 나서 교육장을 나올 때 알았다.
강사가 “상담이 되세요?”라고 말한 이유를.
나는 교류분석에의 3가지 자아 상태 중 어린이 자아가 다른 자아보다 높았다.
강사 말에 의하면 교육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어버이 자아, 어른 자아가 높다고 했다.
특히 상담사는 어버이 자아가 높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어린이 자아가 높으니 강사가 흠칫 놀랐던 것 같다.
교육 내용에 의하면 나는 상담사로 부적합했다.
그런데 상담을 하려면 어버이 자아가 높아야 하나?
당시 나는 초심 상담자였기 때문에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내 의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담심리 석사 공부를 통해 교류분석이론에서 상담사는 어버이 자아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교류분석 워크숍 강사의 지극히 개인적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버이 자아일 때 즉 초자아는 당위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마땅히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조언하고 가르치는 사람인가?
상담사가 선생님처럼, 내 부모처럼 군다면 나는 상담을 받기 싫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이나 상황은 이해받지 못하고 좋기만 하고 바람직하기만 한 말만 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개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육장을 나오면서 엉뚱한 각오를 했다.
어린이 자아를 가진 상담사가 되는 것이다.
어린이 자아를 갖고도 상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상담사가 되어보자.
이런 내 각오를 당시 강사가 들었다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을 것이다.
저러니 어린이 자아를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라고 했을 것 같다.
어버이 자아를 키울 생각은 않고 제 멋대로라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초심자를 벗어나 14년의 경력을 가진 상담사가 되었다.
지금 내 자아는 어떤 자아가 높을까?
짐작되는 대로다.
직감을 활용하고 엉뚱해도 궁금하면 질문을 하는, 나는 어린이 자아를 갖고 있는 상담사가 되었다.
내가 상담에서 훌륭한 개소리를 하지 않는 점에 내담자는 만족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엉뚱한 질문들은 내담자들이 살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관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