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 하는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수축기 혈압 139, 확장기 혈압 85. 혈압이 정상수치에서 벗어나 있다. 이상하다? 나 분명히 혈압이 낮은 편이었는데? 입사 이후로 혈압을 측정한 데이터를 보니 평균치보다 낮았던 혈압이 꾸준히 우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흠...
좋은 습관을 이야기하는 내가?? 혈압이 정상수치를 벗어났다고? 이게 무슨 일이지?!!
원인은 자명했다. 나만의 길티플레저, 심야의 친구, 내 뱃살의 숙적. 거의 매일 한 캔씩 마시는 맥주다. 고된 하루의 끝자락, 나도 모르게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에 내가 찾는 그 녀석이 없다면?!!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편의점으로, 슈퍼로 나간다. 오늘 나는 너를 마시고야 만다! 는 일념으로!
맥주가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금세 알딸딸~해진다. 하루종일 동동거리고 애들한테 악쓰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이 기세를 몰아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나름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마셨던 음주습관이 어느새 3회가 되고, 4회가 되고, 5회까지??? 오늘은 회사에서 너무 일이 많아서 마시고, 내일은 애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마신다. 어제는 왜 마셨더라? 그냥 목이 말라서 마셨던 것 같기도?
맥주 한 캔 정도는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고릿적 연구결과를 핑계 삼아 마셔대긴 했다. 사실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았다. 문제는 나의 알코올분해력이 썩 좋지가 않다는 것. 맥주 반 잔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먹어 온 것이 수년이 되었으니. 그에 맞춰 혈압이 우상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를 사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나를 위한 일을 하면서 나를 사랑하자고. 이 연사, 얼마 전에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언행이 불일치하다 못해 몰염치한 수준이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밀려오는 창피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건강검진 결과를 이메일로 받은 날. 나는 금주를 선언했다. 최소한 집에서 먹는 혼맥은 무조건 금지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있는 모임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게 지난주 월요일이었으니, 일주일에 4-5회는 거뜬히 수행했던 혼맥이라는 음주습관을 끊은 지 십일 째다. 고혈압에 좋은 것은 유산소 운동이라는데 항상 종종 바쁜 나의 평균 일일 걸음 수는 만 보 이상이다. 속도만 조금 빨리 내면 따로 더 할 필요는 없겠다. 여건이 되면 가볍게 뛰거나, 경보선수처럼 빨리 걸어 보기도 한다. 아줌마가 헥헥대면서 놀이터 주변을 뛰면 공 차고 그네 타고 미끄럼틀 타던 아이들이 어리둥절 쳐다본다. '오두방정이란 이런 것'이란 느낌으로 엉덩이를 씰룩대며 빨리 걸을라 치면 지나가는 어르신들의 눈길까지 사로잡는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 내 혈압수치가 이 모양인데 남의 이목이 대수랴.
길티 플레저. 하지 않는게 오히려 나았을, 하지만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동을 가리키는 곱상한 영어 단어.
돈 드는 것만 아니라면, 길티 플레저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단한 일상에 숨통을 틔워줄 뭔가가 있다면 죄책감 따위는 기꺼이 저 하늘 위로 날려 보낼 수 있다. 그런데 나이 마흔에 돈 나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몸이 축나는 것이다. 길티 플레저 찾다가 골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맥주 대신 탄산수로 냉장고를 채워 두었다. 커피 대신 티를 샀다.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를 한가득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마흔 살은 나에게 죄책감을 안기면 안 되는 나이이다. 돌이키기엔 멀리 돌아가야 하고, 무너지기엔 지켜야 할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