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에는, 그러니까 조선시대 정도의 시대에는 마을에 훈장님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훈장님은 어느 정도 배워서 학력이 높은 사람이었고, '스승은 곧 하늘과 같다.'라는 통념이 통했기에 훈장은 아주 대접받고 존중받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회초리'라는 도구로 체벌도 허용되었다. 훈장은 아이들에게 절대자였으며, 종아리에 회초리 자국이 생겨 집에 와도 부모 중에 훈장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 자녀가 잘못했기에 훈장에게 맞았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광복을 맞이하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큰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전쟁 후 황폐해진 땅에서 가난에 벗어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발버둥을 쳤다. 그때는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고, 한글 및 수학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까막눈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학부모들은 자신은 배우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지만, 자식들은 잘 배워서 보다 풍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것을 이루어주는 선생님은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학부모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어린 나이부터 나갔기에 초졸, 중졸, 고졸 학부모들도 많았다. 자신보다 많이 공부한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신뢰하였다. 담임선생님에게 이렇게 당부의 말을 하였다.
"선상님, 부디 저희 애를 때려서라도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공부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때려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선생님도 '사랑의 매'라는 회초리나 밀대자루로 아이들을 때리며 교육하는 것이, 본인이 잘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출처: 웹, yna.co.kr
점점 세월이 흘러, 국민의 교육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이제는 학부모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대졸이다. 자신도 배운 만큼 배운 사람인데, 지적으로 뛰어날 것이 없는 선생님을 이제는 신뢰하지 않는다. 공부의 정도가 다는 아니겠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은연중에 그러한 잣대로 사람을 평가한다. 나는 해외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영어발음도 좋으며 영어를 유창히 잘한다. 그런데 학교에 있는 영어전담교사의 영어실력은 당연히 형편없어 보인다. 배운 사람은 안 배운 사람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가 병원에 진료를 보러 가면 아무리 젊은 의사라도 의사는 하대하지 않는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6년의 의대공부를 해야 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사도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여 더욱 전문성을 신장하면 어떨까? 요즘 학교 현장에는 '금쪽이'가 참 많다. 학교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아동 상담, 심리 치료 등 지금 교육현장에서 필요한 많은 분야를 더욱더 연마하여 교육현장에 투입하면 학부모들이 좀 더 존중하지 않을까 싶다. 오은영박사님을 대하듯. 물론 이것은 모두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선생님을 하대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학부모의 연령대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결혼을 일찍 하였다. 20대 중후반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가 8살이 되어 입학을 할 때 학부모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이다. 그 나이는 사회에서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여 직장에서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직장생활을 하는 나이이다. 그러한 자신의 위치이기에, 학부모의 자격으로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도 조금은 자신이 낮음을 은연중에 느낀다. 담임선생님이 직장상사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결혼을 30대 중후반에 한다. 아이를 낳아 길러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 학부모의 나이는 40대 초중반이 된다.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사회생활을 꽤 하였기에 사람 대하는 것도 능숙하다. 그러한 학부모가 학교의 담임을 대함에 있어서는 거리낌이 없다. 담임과 대화에서, 상담에서 전혀 조심스러움이 없다. 가끔은 반말 비슷하게 말을 낮추거나 끝을 흐리면서 대화를 하기도 한다. 담임이 학부모보다 나이가 훨씬 적거나 젊은 사람이다 싶으면. 물론 이것도 모두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요즘은 자녀를 한 명을 낳아 키우는 집이 많다. 형제가 있는 집도 가끔 있지만 점점 한 명만 키우는 집이 느는 것 같다. 그러한 학부모에게 자신의 자녀는 너무나도 소중한 보물이다. 예전에는 나의 아이도 소중하고, 너의 아이도 소중하니 다 함께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면, 지금은 내 아이만 소중하다는 학부모가 많은 것 같다. 그러한 마음으로 담임을 대하면서, 담임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자녀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면 너무나도 마음이 상한다. 담임이 좋게 보일리가 없다. 담임에 대한 악감정이, 담임에 대한 '하대'의 태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도 모두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출처: 포토뉴스, news.naver.com
글의 내용이 좀 조심스럽지만, 이런 내용의 글을 적고 싶어서 한 번 풀어서 써봤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학부모와 교사가 신뢰와 믿음 관계가 아닌, 그저 교육수요자와 교육제공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네요. 그러면서 학부모가 교사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왠지 씁쓸하기도 하네요. 요즘 학부모들은 초등교사의 위치를 생각함에,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보다는, 우리 아이를 돌봐주는 보육자'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초등교사는 '보육자'가 아니라, '교육자'로 학교에 남고 싶답니다. 학부모들의 '하대'가 아닌, '존중'을 받으면서 그들의 자녀를 가르치고 교육하길 원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