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고랭
나시고랭.
조카녀석 저녁으로 뭘 해줄까 고민하다, 나시고랭을 만들어 줬다. 유튜브에 검색해서 나오는 나시고랭이란 이름의 맛있는 볶음밥 레시피가 아닌, 자카르타 길거리에서 먹는 오리지널 나시고랭 레시피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특별한 소스가 필요하긴 하지만, 상관없다. 비슷한 맛을 내는 법을 알고 있다.
큰 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이 올라오면 계란을 원하는 만큼 넣어준다. 계란을 스크램블 만들 듯이 휙휙 휘젓는다. 계란이 잘게 부서졌을 때쯤, 계란 하나당 소금 한 꼬집씩 넣어준다. 그리고 밥을 넣고 밥을 부셔준다. 덩어리진 밥이 잘 부서졌다 싶으면, 밥 위에 소금, 설탕, 간장, 등 온갖 소스를 넣고, 밥알에 소스가 잘 베이도록 계속해서 휘저어 준다. 팔에 마비가 오고, 밥알이 날리도록 휘저어 주면 길거리 나시고랭 완성이다. 대충 만드는 것 같아도 맛은 기가 막힌다.
만들다 보니 양 조절에 실패해서 조카와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 맛있게 나눠 먹었다. 조카의 ‘삼촌 맛있어 내일 또 해줘’란 말을 듣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인도네시아 초창기에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사 먹을 수 있는 건, 길거리 노점상 음식들뿐이었고, 그중에서 나시고랭이 내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천원이 안되는 돈으로 한 끼를 든든하게 때울 수 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5끼를 나시고랭으로 때우며 두 달 넘게 버텼다. 그러다 보니 나시고랭 매니아 보다는 나시고랭 판별사가 됐다.
두 달 동안 나시고랭을 먹으며 버틴 후부터는 나시고랭을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돈을 벌기 시작한 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나시고랭을 사 먹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생 나시고랭 식당을 만났다.
늦게 퇴근한 어느 날, 집 근처 식당은 전부 문을 닫았다. 별수 없이 열린 식당을 찾아 동네를 배회하는데, 앞에 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로 땅을 툭툭 치면서 걸어가는 시각장애인 한 분이 계셨다. 하필이면 골목은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는 어두운 골목이고, 옆에 오토바이도 쌩~ 하고 지나다녀서 혹시나 무슨 사고가 나지 안을까 내가 더 겁이 났다. 그래서 오토바이가 알아서 피해 갈 수 있도록 핸드폰 플래쉬로 주변을 밝혔다. 그렇게 3분 정도 걸으니 환한 큰길이 나왔다.
혼자 속으로 뿌듯해하며 이제 갈 길 가려 하는데, 아까 그 시각장애인 분께서 간판 없는 어떤 식당 안으로 들어가셨다. 나시고랭 전문점이다. 눈이 불편하신 분이 그 험한 길을 와서 나시고랭을 사 먹는다? 대박 맛집의 기운이 느껴진다.
가격은 1,500원으로 길거리 나시고랭 식당 가격의 1.5배였다. ‘음, 비싼 집치고 나시고랭 맛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하는 의구심이 약간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 주문해봤다. 소스도 그렇고 내용물도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딱 한 가지가 달랐다. 센 불에 수분이 완전히 날아갈 때까지 밥을 볶는다. 고슬고슬 한 밥알이 반짝이는 소스 옷을 입었다. 때깔이 다르다.
그 자리에서 당장 맛보고 싶었지만, 식당이 너무 비위생적이라, 참고 포장해서 집으로 향했다. 뛰듯이 집으로 들어가 손이 안 보이게 봉지를 뜯고 포장을 연다. 밥에선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숟가락으로 나시고랭을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는다.
밥알이 살짝 딱딱한가 싶고, 음식이 약간 메말랐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밥알은 쫄깃하고, 밥알에서 소스 맛이 베여 나와 입안에 군침이 흐른다. 졸졸 흐르는 개천이 아닌,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너무 맛있다. 그때 이후로 그 집은 나시고랭 인생 맛집이 됐다,
그 뒤로 인도네시아에 놀러 온 사람들이 나시고랭 맛집을 추천해 달라 하면 무조건 그 식당을 이야기해줬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식당 위생 때문에 식당까지는 갔어도, 주문까지 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맛있는 식당도 코로나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제는 전설로 사라졌다.
그래도 그 식당 덕분에 밥알을 볶으면 볶을수록 맛있어진다는 비법을 배웠으며, 그 비법은 조카를 위한 식탁에 놓여있다. 조카에게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긴 한데, 글쎄, 힘들고 귀찮다. 일단 내일 나시고랭은 대충 볶아서 또 해달란 말이 나오지 않게 만들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