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가면)
건강증진센터 매니저가 내게 찾아왔다.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센터에서는 잘못한 게 없는데 고객이 부당하게 민원을 제기해서 골치 아파 죽겠어요'라고 했다."
대학병원에서도 건강증진센터를 운영한다. 예전엔 '건강검진'이란 용어를 사용했지만 요즘에는 대부분 '건강증진'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민원인이 고객상담실을 방문했다.
"Who is the head of counselling office here? I am an American lawyer."
영어를 구사하면서 본인이 미국 변호사라고 주장하는 한국인이었다. 거들먹거리면서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사기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러나 워낙 당당하게 말하고 영어를 사용하면서(나는 영어가 약해서 그의 유창한 영어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법률 용어를 사용해서 긴가민가하다. 당시 민원상담 경력이 일천하여 더욱 졸리기도 했다.
병원 측의 귀책사유가 없어서 보상할 근거가 없다고 했으나 고소하겠다. 자료를 내놓아라. 당신하고 말이 안 통하니 변호사와 이야기하겠다고 주장해서 원내 변호사와도 상담을 주선했다. 원내 변호사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자칭 미국 변호사는 며칠까지 자료와 의견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면서 갔다. 병원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
사흘 후 자칭 미국 변호사가 외국인 미녀 비서를 대동하고 왔다. 본인 비서라고 했다.
"아...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Just record it! You know how to use recorder, right?"
(어리둥절해하면서) "네?"
(당황해서) "그냥 기 록 하 라 고! 기! 록!"
본인이 영어를 사용해서 미국인 인가 했는데 러시아 사람이고 영어를 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단기계약으로 사용하는 인력이었다. 그렇게 외국인 미녀를 비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시 법률용어를 사용하면서 병원 측을 압박했다. 상담에 대해서 비서를 시켜서 녹음을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라고 하면서 우리도 녹음하겠다고 동의를 구했다. 상담실에는 버튼을 누르면 CCTV에 녹음이 되는 기능이 있다. 평상시에는 CCTV만 돌아가지만 특별한 경우 버튼을 누르면 녹음이 된다. 녹화는 CCTV 녹화 중이라고 게시판을 붙여놓으면 문제가 없지만 녹음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자칭 미국변호사의 지시를 받은 비서도 황당해하는 반응이다. 전혀 전문비서 같지 않은 자세다.
장시간 장황하게 본인이 외국인 비서가 있는 미국 변호사라고 우쭐대면서 여러 주장을 했다. 병원 측은 여전히 병원 측의 과실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녹음과 녹화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긴장되게 했다. 뚜렷한 결론이 없이 상담은 종결되었다. 자칭 미국 변호사는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하고 외국인 미녀 비서를 대동한 채 떠났다.
그 이후로 미국 변호사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도 오지 않았다. 어디 간 것일까?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오지 않으니 또 궁금해지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고객은 미국 변호사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미국 변호사 자격에 관한 사실을 확인해 준 적도 없고 원내 변호사 말에 의하면 미국 변호사는 먼저 본인의 신분을 확실히 밝힌다는 것이다. 본인의 영어와 단기계약으로 데리고 온 외국인 비서로 본인을 포장한 것이다.
더 완벽히 포장했다면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잘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포장하면서 살아가는가.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다"라고 했다. 가수 조성모도 '가시나무'란 곡에서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노래했듯이, 우리 안에는 정말 여러 모습의 내가 존재한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가면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가면에 자신조차 속아 진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후로 고객을 대할 때 포장뒤에 숨은 내면을 보려고 노력하게 됐다. 돌이켜보니 그 가짜 미국 변호사는 나에게 '포장된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소중한 교훈을 준 스승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