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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병원장이랑 친해!

연고주의(학연, 지연, 혈연, 군연, 종교연, 직연)

by 서기

의료급여수급자 할아버지가 고객상담실을 찾아오셨다. 의료급여로 처리할 수 없는 항목을 무조건 급여처리해 달라고 하는 억지 요구였다.


"어르신, 이 건은 해드릴 수 없어요. 제도적으로 안 돼요"

"그런 게 어딨어! 무조건 해줘야지~ 내가 병원장이랑 친해! 국회의원 OOO도 잘 안단 말이야"


연세 드신 어르신들 중 찾아와서 예전에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이랬던 사람이란 말이야.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과거의 나를 알아달란 것일 테다. 그런 경우 대부분 그냥 들어드린다. 아 그러셨군요. 대단하셨네요. 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은 좀 다르다. 현재도 유력한 사람, 나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 조심해라. 나한테 잘해라. 뭐 이런 식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약간의 오기가 발동한다. 절대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당신 실수하는 거야. 내가 병원장에게 이야기해 놓을 거야, 두고 봐"


그러면서 고객상담실을 나갔다. 대개 이런 경우는 이걸로 끝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실제로 병원장이 친히 고객상담실로 찾아왔다.


"O선생님,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이신데 어떻게 안될까요? 워낙 강력하게 부탁하셔서.."

"원장님 이건 제도적으로 이렇게 되어있어서 병원에서 해드릴 수 없는 건이에요"

"아 그렇군요.... 어쩌지.."


병원장은 난감해하면서 그래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시면서 나가셨다. 직장의 상사가, 그것도 병원장이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상황. 거절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원장님이 무슨 약점을 잡힌 게 있으신가? 아니면 큰 신세를 지신게 있으신가?'


할아버지의 민원이력을 보니 화려했다. 원무팀, 외래진료과, 심지어 주차관리부서까지 여러 곳에서 막무가내로 소리치며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분이 목사님이라고 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사흘 후, 병원장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다른 방법이 없겠냐는 물음에 확인했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보고 드렸다. 그리고, 그분의 화려한 민원이력을 말씀드리면서 병원장님이 너무 깊숙이 개입되시면 오히려 좋지 않으실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병원장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라셨다. 전혀 그런 모습을 모르시는 듯했다.


이후 할아버지는 전화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다른 부서에서도 조용하다고 했다. 원장님께서 그 목사님께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민원이력을 듣고 나서야 '친분'과 '원칙'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신 것 같았다.


이런 일은 비단 이분뿐이 아니다. 어떤 환자는 본인이 추기경님과 잘 안다고 한다. 어떻게 아시냐고 물으면 페이스북 친구라고 하는 것이다. 본인은 잘 알겠지만 그분은 잘 모르실 것이다.


이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나도 OOO대통령 잘 알아, 그분이 나를 모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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