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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사건 vs 사적사건

사건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 - 통제 대 경험

by 이준석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움은 편안함을 유도한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나타나 나의 적응을 방해한다.

그리고 불편한 마음은 다가온다. 그 불편함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곧 평안을 유도한다.


그렇기에 마음은 불편하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사건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관찰 가능한 피부 밖의 외부사건과 쉽게 관찰되지 않는 피부 안의 사적사건.


기차표 사기를 당했다. 외부사건의 문제가 발생했다! 나의 예측과 다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유대기로 대표되는 여러 질문들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며 이는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과 자원의 투입, 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망라한다. 어떠한 예측이 실현되도록 통제력을 발휘하는 적극적 행위이다. 나는 충분히 해결책을 찾기 위해 정보 탐색을 했고 암리차르로 가는 나의 예상된 방식에서 이탈하여 좌절했다.


사적사건은 마음이 작용하는 일로서 우리의 감정, 생각, 감각 경험 등을 대표한다. 사적사건의 문제가 발생하면 정서, 사고, 이상 지각 및 감각 등의 장해를 뜻한다. 그렇기에 사적사건의 문제는 외부사건의 문제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기차표 사기의 외부사건은 나의 사적 경험에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적 경험의 장해와 파장은 '고통'을 수반한다. 나는 인간이기에, '고통'을 회피하도록 진화되었다. 외부 사건과 관련해 고통을 초래할 위협적인 일들이 반복되지 않게 대비하고 통제하는 것은 생존력을 높이는 데 효용이 있다. 이유대기가 적절히 기능한다는 것은 문제해결 전략이 외부 사건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정상으로의 변화를 위한 통제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마음이 하는 일에 이유대기의 본질은 효용이 없다. 사적 사건으로서 마음이 경험하는 생각, 우울, 불안, 초조, 분노, 짜증, 화 이상 신체 감각 등에 관한 이유대기는 우리가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될까? 내가 왜 우울한지, 왜 불안한지, 왜 초조감을 느끼는지 등등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 통제하는 시도는 효용이 없다. 이유인 즉, 외부사건에 이상이 발생하면 마음은 여지없이 고통으로 반응하니 자극에 따른 반응을 통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나의 고통은 자연스럽기에 원래 없던 고통처럼 통제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을 듯하다. 그리고 '1A 기차표 사건'은 이미 발생했다. 이미 이미 과거의 사건에 내 마음의 경험이 왜 그런 것인지 따져 묻는 질문은 너무나도 반추적이고 내 고통을 키우기만 한다. 나는 지금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의 경험의 불편함과 고통에 정상화를 위한 과잉 통제 시도는 역설적으로 더 강한 이상을 낳는다.


두 사건은 상호 관련성이 있다. 외부 사건의 문제가 반복되면 사적 경험에 장해와 파장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적 사건의 장해는 외부 사건에 대한 대응력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상호 관련성은 우리가 외부와 사적 사건을 구분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나는 외부사건과 사적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마음을 문제로 여기고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경험으로 치부하고 있다.


지금 내가 이유를 대는 것은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가? 혹은 앞으로의 일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1등급 기차표 구매'에 따른 마음이 느끼는 불쾌감('사기를 당했다',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 '불안하다.', '걱정된다.')을 문제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없애거나 통제하기 위해 이유를 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마음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유를 대는 나의 노력은 오히려 나를 더한 통증으로 내몰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

나는 마음이 하는 일에 불필요한 이유를 대었고 그 방법이 효용이 없었던 것뿐이다.

나는 마음이 하는 일을 찾아야만 한다.


나는 침잠한다.

침잠의 맥락 속에서 나의 마음은 기차 안에 없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언행에 얼어붙는다.

어쩔 줄 몰라서, 나는 타인의 행동과 말 그리고 감정에 나 자신을 의탁한다.

차갑게 전달되는 타인의 음성은 내면의 목소리를 마비시켜 내 욕구를 꿈틀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마음을 공허로 채운다.

공허로 가득한 차가운 마음은 나의 바람이 들어갈 틈을 메운다.

나의 바람은 없다.

나는 뭐든 괜찮다.

......

나의 바람은 정말 없는 걸까?

그러면 나는 뭐 하러 이 생을 살아가는 걸까?

나의 바람이 있다면,

나의 소망과 바람을 담은 생의 숨결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까?


나는 마음에서 빠져나올 단서가 필요하다. 단서는 어디에 있을까?



암리차르 황금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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