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석 Oct 16. 2024

이유대기의 본질과 마음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할 때

인도 여행기 - 사건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 (1)

이유대기의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여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본질은 경험하는 것이다.


이유대기의 본질과 마음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할 때

마음은 이유대기의 본질을 따르려는 부자연스러움을 낳는다.



델리에서의 시간은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델리에 떨어진 하루 이틀은 문제해결에 전념한다. 

숙소 밖을 나서면 여지없이 동공은 확장되고 시청각은 예민해지며 차가워진 손과 식은땀은 교감신경계가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유는 찾아볼 수 없고 이완시킬 수 없는 정신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러한 문제해결 모드는 주효하다. 나는 뉴델리의 관광지와 상점들을 섭렵(?)하며 묘한 성취감을 얻는다. 

여행에서의 성취감이라니... 그렇다, 여행 1~2일 차의 핵심 감정은 성취감이다. 처음 마주하는 환경에서 나의 단기 계획은 목표를 향해 순항한다. 내가 이동을 원할 걷거나 타며, 배고플 먹거나 마시고, 보고 싶을 때 관람하고, 일상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 자체로 나는 성취감을 느낀다. 

동시에 기본적 안전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 해결/충족되었음을 느낀다.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시간이 갈수록 문제해결 모드의 지배는 약화된다. 

나는 인도에 적응하고 있다. 


주요 스트레스원이었던 거리에서 호의(?)를 베푸는 호객꾼들의 사기 수법은 더 이상 자극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순진하다. '나를 속이려면 노력이 더 필요하지 않겠니?' 

그들의 미숙함을 무시하고 웃어넘긴다. 든든한 두 조력자 덕에 나는 무서울 게 없다. 

여행 이튿날 밤, 나는 시크교인들의 성지 암리차르(Amritsar)로 향하는 SL 기차표를 끊어둔다. 


다음 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역사로 이동한다.

역사 플랫폼 입구에서 제복을 입고 소총을 맨 한 남성이 나를 멈춰 세운다. 그는 검표를 한다. 표를 확인한 그는 뭔가 이상이 있다는 듯 미간은 찌푸리며 무어라 말한다. 말은 분명한 언어적 신호이지만 나는 말과 표정 모두 비언어적인 신호로 경험한다. 그 신호는 뭔가 내 표에 이상이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나의 신체 반응이 긴장한다. 동공은 수축되고 심박이 오른다. 문제해결 모드가 작동한다. 주변에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 거린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있지만 아무도 없다. 

나는 생각한다. '왜?, 저 표정 뭐야?',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그는 내 표를 쥔 채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며 손짓한다. 

'따라오라고?'.


내 경험과 규범적 지식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 경찰은 치안을 위한 조직이다. 

나는 암묵적으로 제복을 입은 사람은 신뢰할 만한 사람일 것으로 판단한다. 

나는 앞서 가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그는 역사 밖의 무슨 여행사 비슷한 매장으로 나를 안내한다. 

들어가 보란다. 

매장의 직원은 내 표를 확인한다. 

그는 무어라고 말한다. 꽤나 호의적이다. 

그가 보내는 언어/비언어적 신호를 종합적으로 해석한다.

<그 표는 대기표이므로 사용불가, 새로운 표 구매해야 함>


나는 SL 등급 티켓을 구매한 사람이다. 그리고 생애 첫 SL 등급 인도 기차를 경험할 예정이다. 

그런데, 내 기차표는 쓸모없다. 나는 암리차르를 너무나도 원한다. 

내가 가진 기차표가 쓸모없으면 못 가겠지만 그는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듯하다. 

나는 내가 가진 SL등급 티켓을 주고 새 기차 티켓을 구매한다. 

그가 이러쿵저러쿵 뭐라 뭐라 요구하는 끝에 기차표에 더해 추가로 얼마 간 돈을 더 지불한다. 

나는 암리차르로 갈 수 있다.


......


인도의 기차표는 내가 알 수 없는 힌디어와 영어로 쓰여 있어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없다. 

나는 표를 받아 들고 심각한 얼굴 표정을 지은 채 역사로 걸어간다. 

열차를 기다리며 손에 쥐어진 새로운 기차표를 뚫어져라 본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문자는 1A, 1145, NEW DELHI, AMRITSAR, 출발시각, 그리고 도착시각. 

'흠......' 

'1A. 1A... 1A...... 1145!'.


나는 돈이 별로 없다. 내가 타야 할 기차는 SL등급이어야만 한다. 

가슴 쓰린 1,145 루피... 나는 1박 숙박도 150~200 루피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1,145 루피면 최소 5일 치 숙박료이다. 

그런데 기차표 하나가 1,145루피에 지불하지 않아도 될 수수료(?)를 그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내게 불쾌감을 준다.


지금 여기 현재는 '1회 기차표를 1,145루피에 플러스알파를 지불하고 암리차르로 간다.'로 정리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미 과거가 된 '1A 기차표 사건'에 문제해결 모드는 효용이 없다. 

그렇기에 현재 시점 이후 '1A 기차표 사건'에 이유대기의 본질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이유를 묻는다. 

'왜 그 사람 따라가서 사기를 당하냐', 

'그때 뭐냐고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어야 했는데...', 

'그 돈이면...', 

'그런데 경찰 아니었나? 어떻게 사기를 칠 생각을 하냐?',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바보같이 당했지?'.


...... 


이유대기의 끝에 나는 소리 내어 욕을 한다. 

청자는 없다. 

그 욕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이유대기의 본질을 따른다. 

그런데 목표는 뭘까?, 무엇을 해결하고자 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나는 내가 들릴 만큼 소리 내어 욕을 한다. 

이유대기의 종착지는 '욕'이다. 

나를 향한 비난의 집약체인 '욕'은 곧 인도 여행에서 사기당한 머저리로 나를 '개념화'한다. 


이유대기의 본질과 마음의 본질이 구분하지 못할 때, 

마음은 이유대기의 본질을 따르려는 부자연스러움을 낳는다. 

그 부자연스러움은 나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되어 '개념화된 자기'를 만든다.


나는 침잠한다.


 

뉴델리 - 암리차르행 1A CLASS 티켓, 예상하지 못했던 최고급 열차칸에서 첫 기차여행은 시작된다.


이전 02화 프로그램화된 이유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