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자가 배를 탄다고?-항해사가 되려면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하얀 제복을 입은 멋진 남자 3명이 여고생들로 가득한 우리 반에 들어왔다.
저 중에 한 명은 우리 오빠였다.
반 친구들 아니 전교생의 환호와 웅성거림에 괜스레 내가 더 뿌듯해졌다.
제복빨이 크다.
오빠가 대학교 홍보를 위해서 우리 여고에 방문한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이하 해대)의 전통이었다.
사관학교에 대해선 많이들 알지만 해대는 생소했다.
특히 내륙인 정읍시에 사는 우리에게는 더 생소했다.
애초에 오빠가 해대를 가게 된 것도 선배들의 이런 학교 방문 홍보 덕분이었다.
배를 타면 군복무를 면제해 준다는 것,
돈을 아주 많이 번다는 것,
거의 공짜로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것 등으로 순진한 학생들을 홀렸다.
SNS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
재학생들이 자신의 모교에 방문하여 실시하는 직접 홍보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인재를 모으기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학생들이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했나 싶다.
배 타는 게 어떤 건지
많이 번다는 그 돈이 어떤 건지나 알고 그랬을까?
그저 하던 대로 앵무새처럼 그런가 보다 하고 반복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오빠도 그 말에 낚였다.
사정이 좋지 않은 집안 경제를 생각해 장남으로써 책임감을 갖고 해대에 갔다.
부모님은 오빠가 국립대에 가길 원하긴 했지만
배를 탄다는 건 꺼림칙해하셨다.
그렇지만 저렴한 학비에 기숙사비&식비&의류비 공짜는 상당한 유혹이었다.
엄마는 아직도 종종 부산은 조폭과 범죄의 소굴인 줄 알아서 대학 보낼 때 너무 무서웠다고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처음 1년 간은 오빠 걱정에 가끔 울기도 하셨다.
근데 막상 딸인 내가 갈 때는 별로 걱정을 안 하셨다.
내가 거기서 잘할 것 같기도 하고
오빠가 잘 챙겨줄 줄 알았다나?
어쨌든 오빠에 이어 연년생인 나도 결국 해대를 가게 되었다.
항해사라는 특이한 직업도 매력적이긴 했지만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딸인 나에게만 엄한 잣대를 대는 부모님에게서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3남매에 넉넉지 않은 우리 집 형편상 사립대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고, 어딘가 기숙학교를 가야만 허락해 주실 것 같았다.
애초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여자는 졸업하고 꼭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어필하면서 허락을 받았다.
물론 나는 꼭 배를 탈 생각으로 들어갔지만.
싼 학비, 돈 많이 버는 특이한 직업.
이것 만으로도 내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거기다 멋있는 제복은 덤이었다.
배에 대해 완전 무지했던 우리 가족은
그렇게 상선과 어선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