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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의 없음은 없다

# 연루됨에 관하여

by 무재 Mar 28. 2025

 피지배자의 입장이었던 우리로서는 우리 조상들이 점령하고 착취한 광범위한 역사에 대해 혼란을 느낄 일이 없다. 눈부신, 약탈로 이룬 제국의 영광과 현대의 도덕적 관념 사이에서 어지러울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천 년 전부터 우리였다는 믿음이 있다. 인종적, 문화적으로 단일했었다는 믿음. 피지배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았고, -일제강점기 35년과 약 97년여의 고려 원 간섭기- 동북아 끝에 매달린 지정학적 위치가 결합된 폐쇄성으로 늦었던 근대화, 숱한 고난의 경험에도 디아스포라 적 체험 또한 비교적 적었다.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역사와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고- 남한이라는 섬으로 한정하면 내가 배운 역사에서도, 현재에도 우리는 단일하고,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거나 뿌리 뽑힌다는 것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언뜻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거나. 이것은 필연적인 다인종 미래 사회의 강력한 적인 동시에 아늑한 정신의 요람이다. 


 생각하면 놀랍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방을 떠나 국경을 넘고, 이중 언어를 쓰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부모 혹은 조상과 다르게 규정하는지를 알게 되면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그런 떠도는 자들, 뿌리가 다른 자들을 인식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여전히 표류와 다름에 인색하고, 쉽게 두려워하며,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근거 없는 믿음 또한 가지고 있다. 무지와 두려움에 배척과 혐오라는 방패를 갖다 대는 일은 반사작용과 같은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암시하는 이미지에 폭력을 덧씌우는 건 수고롭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인에겐 그들 조상의 잔학했던 업보를 책임질 의무가 있고, 독일인들은 전 유럽에 원죄가 있다. 우리는? 누구도 침략하지 않았다. 누구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리 자신을 떠올린다. 우리는 너무 우리에게만 매몰되었기에, 그동안 불난 집에 불을 끄고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화살표를 저 바깥으로 돌리는 데 미숙하다. 이제 그럴싸한 외형을 갖췄지만 제 손 안의 것을 나누기 싫은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모르는 척한다. 


 나를 설명할 때 복잡한 뿌리들을 애써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일, 내 언어가 유일무이한 우리의 것이란 사실, 먼 과거로부터 속죄의 책임감을 타고나지 않은 것은 행운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 연루된 지금은 우리가 저 먼 바깥에 무엇을 뿌리고 있는지, 어떻게 되돌려 받을 것인지를 지켜봐야 한다. 우리로만 향하던 생각을 돌려 어지러움을, 혼란을 느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저마다 개별적인 악을 행했고, 가해자성을 물려받았으며, 아무런 혐의 없음이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루됨을 모른 채 할 수는 없다.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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