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멈추게 만드는 것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결정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요인들을 살펴봤습니다. 완벽한 정보를 찾으려는 강박, 더 나은 선택을 기다리는 마음,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오는 혼란...
이 모든 것들의 뿌리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어요. 바로 '타인의 시선'입니다.
"이 정도 정보로 결정해도 될까?" 하는 망설임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불안이 있었고, "더 나은 걸 기다려볼까?" 하는 고민 속에는 "이 정도로는 부족해 보일까?"하는 시선에 대한 걱정이 있었죠.
오늘은 이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게도, 멈추게도 하는 이 보이지 않는 시선들에 대해서요.
석촌호수를 산책하다가 한 버스커가 무대를 세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은 공간을 꾸미고, 기타를 꺼내고, 마이크를 맞추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기대감을 느끼게 했죠. 자리를 잡고 그의 첫 곡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잠시 후 눈을 내리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이 처음이어서요, 너무 떨리는데요. 박수 한 번만 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건 버스커가 아닌, 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었어요. 무심히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박수를 쳤습니다. 저도 열심히 손뼉을 쳤어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무대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관객이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삶이라는 무대 위의 버스커이기도 합니다. 출근길 옷차림을 고르는 순간부터 퇴사를 결심하는 순간까지, 늘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보이지 않는 관객이 늘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모범생이었어요."
퇴사 고민을 하던 지은님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선생님들한테 이쁨 많이 받았죠, 부모님도 언니들보다 제 자랑을 더 많이 했고요. 지금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니까 기분이...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우리 안에는 시선이 쌓이는 방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유치원에서 처음 발표했을 때 선생님의 미소, 중학교 성적표를 받아들던 엄마의 표정, 첫 직장 면접관의 날카로운 눈빛까지. 그 모든 순간의 시선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어요.
몇해 전, 저는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국어를 가르쳤어요. 그러다 신림동에서 5급 행시 언어논리 강의를 제안받았습니다. 이것저것 조정할 게 많았지만, 행시 강의라는 말에 설렜어요. 뽐내고 싶었습니다. 주변에 조언을 빙자해 은은한 자랑을 했어요. ‘신림동 ’라는 말이 주는 묘한 우월감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이야말로 타인의 시선에 가장 취약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랫동안 쌓여온 '쟤는 국어를 잘해'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의 칭찬, 부모님의 자랑, 주변의 인정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이미지였죠. 그래서 신림동 강의도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에서 선택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러고보면 우리의 선택이 온전히 우리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사실은 켜켜이 쌓여온 타인의 시선과 지분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시선은, 제가 생각해보니, 세 겹인 것 같아요. 가장 깊은 곳엔 어린 시절부터 쌓인 기억 속의 시선들, 그 위로 현재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평가, 그리고 가장 바깥엔 SNS라는 새로운 시선의 창. 우리는 이 세 겹의 시선에 싸여 타협하고 때로는 싸워요. 그리고 질 때가 더 많죠.(속상하게도요) 점심 메뉴 하나를 고르면서도 ‘인스타에 올리면 어떨까?’ 고민하고 이직을 결심하면서도 ‘주변에서 어떻게 볼까’를 떠올리는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라고 믿어요. 나도 모르는 새, 타인의 시선은 내 결정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선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확신할 힘이 없어져요. 심지어 내 감정까지도 타인의 눈으로 겸열하게 돼요. 제가 우울 증상을 겪을 때 그랬습니다. 우울증보다 저를 더 우울하게 만든 건 “남들이 보기엔 별 문제가 없는데 나는 왜 힘들까?”하는 생각이었어요. 어느새 타인의 시선이 기준이 되어 지금 존재하는 감정마저 인정할 수 없게 된 겁니다.(지금 생각해도 너무 슬퍼요) 그러다 깨달았어요. 이 시선이 나를 위한 걸까 아니면 그들의 불안이 나에게 투영된 걸까.
우리 마음속에는 여러 방송국이 있습니다. 부모님 기대 방송, 친구들의 응원 방송, SNS의 트렌드 방송… 그리고 내 안의 진짜 방송. 이 방송국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하고 있죠. 대부분은 자신의 방송국 소리를 찾는 데 오래 걸립니다. 그동안 너무 다른 방송들에만 귀를 기울여왔거든요.
특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는 타인의 기대가 내 선택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에 더 크게 반응하게 되죠. 그러다 보면 결국 내 선택은 흐려지고,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결정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제가 연습해온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를 둘러싼 여러 시선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보는 연습입니다. 저는 이를 ‘시선 분리법’이라고 불러요.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간단합니다.
1. 노트를 두 칸으로 나누고 왼쪽엔 '이 일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오른쪽엔 '이 일을 할 때 내가 어떤 기분일까'를 적어보는 거예요. (처음엔 오른쪽이 비어있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비어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뭔가를 깨닫게 되거든요.)
2. 그 다음엔 시선의 무게를 재보는 거예요. 1년 후에도 이 시선이 중요할까? 5년 후에는? 신기하게도 시간의 눈금을 대보면 대부분의 시선이 가벼워집니다.(무거운 시선도 있죠. 하지만 그건 대개 진짜 나를 걱정하는 따뜻한 시선들이에요.)
3. 마지막으로,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고릅니다. 내 방송의 소리에만 집중하면서 주변의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보는 거예요. (처음엔 정적이 불편해요. 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람들이 당신과 발을 맞추지 않는다면, 아마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퇴사로 마음이 70% 기울어진 지은님이 물었어요.
"나나쌤, 제가 정말 이렇게 해도 될까요?"
저는 답 대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날 아침 거울을 볼 때, 지은님의 표정은 어떨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거리의 버스커입니다. 때론 떨리고, 서툴고, 실수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부르는 노래는 진짜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누군가는 우리의 첫무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타인의 시선은 늘 우리와 함께할 거예요. 저의 시선도 누군가에겐 타인의 시선이 되겠죠. 중요한 건 그 시선을 어떻게 바라볼지, 얼마나 마음에 담아둘지는 우리의 몫이라는 거예요.
석촌호수의 버스커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해도 좋습니다. 그 떨림 속에 진짜 우리의 마음이 있으니까요.
저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첫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듯합니다.
[오늘의 작은 실험]
노트 한 장을 반으로 접어보세요
10분 동안 양쪽을 채워보세요.
그리고 물어보세요. "이게 정말 내 마음일까?"
다음 주에는 그 작은 목소리를, 우리 안의 진짜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듣는 법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때까지 혹시 시간이 난다면, 밤에 혼자 있을 때 시선 분리법을 한 번 해보시면 좋겠어요. 타인의 시선이 가장 약해지는 그 시간, 당신의 방송이 들릴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