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골이 점지했나, 내 마음이 점지했제

2장 그 시절의 종갓집 시집살이

by 이수영

우리 때에는(6~70년대부터) 국가에서 애기들 많이 못 낳게 피임을 엄청 홍보할 때여. 그게 우리 때부터 적극적으로 했제. 넷 낳으면 제일 많은 거였어.


그래서 사실 나는 셋째까지 낳아놓고는 그 뒤로는 임신 안 할라고 피임을 했어. 내가 어른들 모르게 병원 가서 루프(자궁 내 피임기구)를 끼웠거든? 어른들 입장에서는 애기가 생길 때가 됐는데 계속 안 생기는 거야. 그 윗집에는 애 낳으면 아들만 낳고 그러니까는 시어머니가 샘이 났나봐.


그때는 외아들을 안 알아줬거든. 만약 그 아들 한나 죽어불면 손이 끊어져 분다 해갖고, 그때는 외아들 집으로는 혼사도 잘 안 할라 했제. 그래서 아들 하나 더 낳으면 쓰겄다고 계속 그랬어.


삼신맞이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그래갖고는 시어머니가 지앙맞이(삼신맞이, 자식을 점지해 주고 아이의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삼신에게 지내는 제의) 뜬다고 당골(무당)을 데려다가 저녁 내내 징 뚜들고*… 내 속으로는 인제 애기를 안 낳게 방침을 해놨는디. 무당이 굿 하다가 한복도 내놓으라 하길래 좋은 놈 한 벌 낸께 그것도 불 꼬실라 불고…. 그래서 이런 것을 어찌 해야 쓸꼬… 저렇게까지 해싸니 하나를 낳아야겠다 싶었지.





삼신합동제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그래서 내가 ‘죽은 운도 풀란지그나, 어디 한 번은 더 낳아 볼까’(산 사람 소원 들어주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냐) 그런 마음으로 어른들 없을 때 병원 가서 루프를 빼부렀어. 그래갖고 느그 막둥이 작은아버지를 임신했어. 어른들한테는 그냥 당골들 데려다가 굿 했은께 임신했다고 그렇게 말해부렀제.







대문 금줄(삼신줄)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우리 아래 동네 점방(마을에 있는 작은 가게)에 전화가 한 대 있었어. 거그서 젊은 사람들이 다 놀아. 시아버지한테 누가 와서 아들 낳았다고 말을 전한 거야. 내가 병원에서 돌아와서 보니까 벌써 금줄을 다 쳐놨어. 옛날에는 궂은 사람 집 안에 못 들어오게 새끼(짚으로 꼬아 줄처럼 만든 것)에 꼬치(고추) 찔러서 대문에 금줄을 해놨어.


그냥 시아버지는 시아버지대로 득남내(아들을 낳았을 때 기념으로 내는 턱) 내러 가고. 득남내라고 아들 낳았다고 인자 술 한 탕 먹이러 가는 거야. 느그 할아버지도 생전 그래 안 한 사람이 아들 낳으니까 아기 새 옷을 사다 입히드라고.





시어머니는 또 선영(조상의 무덤 또는 그 근처의 땅)에다 공을 들이더라고. 성주(가정에서 모시는 신의 하나)에다가 음식 차려놓고. 그때는 이레(일곱 날)라고 일주일 가믄 첫 이레, 2주 가믄 두 번째 이레라 해서 거그다 밥 해놓고 물 떠놓고 비손(신에게 병이 낫거나 소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비는 일)을 해. 자식들 건강하니 커주고 만수무강하라고. 손이 귀해갖고 딸 낳아도 그런 것은 잘하셨어.


느그 고모들도 어릴 때 할머니가 오시면 서로 옆에서 잘라고 한당께. 그럼 느그 고모들이 할머니 손 주름을 보고, 손 껍질 듬서 “할머니 손 어째 이래?” 그러고. 아하하하. 막 그렇고 웃고 살았어.





* 삼신은 아이를 점지하고, 태아를 기르며, 순산을 돕고, 태어난 아이를 잘 자라도록 돌보는 신령이다. 당시 가임 여성과 그녀의 식구들은 삼신과 정상적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임신, 출산, 육아에 장애와 곤란을 겪지 않는다고 믿었다.

삼신이 집안을 뜨면 임신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삼신이 나가도 식구들은 삼신의 부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며느리의 불임만 걱정하고 탓하곤 했다. 집안 식구들은 그 원인을 대체로 알지 못하거나 막연하게 짐작만 할 뿐이었다. 마침내 식구들은 답답한 나머지 무당이나 스님에게 불임의 원인을 묻고, 삼신을 다시 모셔오는 의식을 치르는 신앙적 노력을 기울였다.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일상의례사전)』에서 참고



화면 캡처 2026-02-23 171521.png 1970~80년대 가족 계획사업 캠페인 / 출처: 국가기록원 (인구정책 어제와 오늘)


화면 캡처 2026-02-23 171440.png 1970~80년대 가족 계획사업 홍보 포스터 / 출처: 국가기록원 (인구정책 어제와 오늘)


화면 캡처 2026-02-23 172957.png 1970~80년대 가족 계획사업 홍보 포스터 / 출처: 국가기록원 (인구정책 어제와 오늘)


할머니가 기억하는 ‘피임 홍보’는 당시 실제 국가적인 열기였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을 위해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은 70년대에 이르러 민간단체까지 “나라사랑 피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 정도로 범국민적인 운동이 되었다(매일경제, 1976.01.19).
재미있는 점은 당시 신문 보도(동아일보, 1976.04.13)에 나타난 통계이다. 영구 피임 수술이 2년 사이 10배나 급증할 만큼 피임이 대세였지만, 아들이 둘일 때 수술하는 비율(53.2%)이 딸만 둘일 때(26.3%)보다 두 배나 높았다. 국가의 '나라사랑' 구호조차 집안의 '대이을 아들'에 대한 욕심은 쉽게 꺾지 못했던 셈이다.
셋째까지 낳고서야 피임을 결심했던 할머니의 마음 뒤편에는, 이렇듯 국가의 명령과 집안의 전통이 치열하게 부딪히던 시대적 풍경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