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간 치열하게 보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한풀 꺾인 더위와 함께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궁금했는데 영 소식이 없었다.
시골집에 현지인과 함께 살며 언어를 배우고 있었지만, 그 외에 나에게 어떤 일이 맡겨질지 알 수 없었다.
매일 마당에 있는 텃밭을 가꾸고, 물을 뜨러 시내를 돌아다니고(상하수도가 없어 물을 떠 와야 했다.),
가끔 시장에 가고, 이틀에 한 번은 반야(중앙아시아, 러시아에서 흔한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했다.
삼시 세끼 집에서 현지식 혹은 한식을 함께 만들어 먹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투잡하며 바쁘게 살던 나에게 이렇게 단조로운 일상은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지는 일이라곤 낮에 마당에 나가 손빨래를 하는 게 다였다.
근데 이 일은 정말 하기 싫었다.
한국에서 손빨래라고 해봐야 어렸을 때 가끔 학교 실내화 빠는 게 다였던 나에게 매번 모든 빨래를 손으로 해야 한단 건 참 곤욕이었다.
결국 손으로 돌리는 세탁 도구를 해외직구로 사서 한국으로 받고, 그걸 다시 내가 있는 중앙아시아 시골 지역으로 배송받아(배송비만 20여만원) 빨래를 해결하려 했다.
나의 언어 선생님이자 동거인이었던 현지인 언니는 마당에서 열심히 기구를 돌리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00아, 너 그거 정말 빨래가 된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다.
민망하게도 언니말대로 빨래감들은 전혀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돈만 날리고 손빨래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일을 회피하려했던 대가였다.
빨래와 관련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최고 50도까지 올라갔던 그해의 폭염과 그 땅의 건조한 기후는 빨래 말리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날이 따뜻한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손빨래한 후 대충 짜서 널어놔도 30분이면 빨래가 빠짝빠짝 말랐다.
한여름에는 빨래를 다 널면 바로 처음으로 가서 걷기 시작해도 될 정도였다.
(-20도를 웃도는 겨울엔 얼어버린다)
한국의 습한 장마철을 겪고 있는 지금 가장 그리운 풍경 중 하나이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휴식.
가지 않는 시간에 현지어 사전을 사서 달달 외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다행히도 언어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시장에는 친한 상인들이 많아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인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몇 명과도 친해져 길에서 만나면 이야기를 나눴다.
언어 선생님과의 문법 수업도 참 도움이 많이 되었다.
문법까지 정리되자 언어습득에 꽤 속도가 붙었다.
다른 것도 늘었다.
그곳의 여름은 온갖 과일의 천국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살구나무와 체리나무, 플럼나무,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심겨 있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 탓에 그곳의 살구는 극상품이었다.
달기가 어찌나 달고 과실이 실한지... 마당을 지나다니며 하나씩 따서 먹기도 하고 체리와 살구를 한 바구니씩 따와서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먹기도 했다.
과일은 먹어도 먹어도 잘 들어가는 탓에 살이 정말 많이 늘었다.
앞자리가 바뀌는 경험을 몇 년 만에 하고 나니 어느새 과일이 사라지고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가을의 어느 날, 드디어 내게도 일이 주어졌다.
방과 후 교육을 하는 센터에 한국어 초급 클래스가 열리는데 거기 강사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한국어 초급 신입생은 3명 모두 철자부터 가르쳐줘야 하는 아이들이었기에 현지어 초급은 뗀 나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매일 아침 10시경 느긋하게 집을 나와 15분여를 걸어 센터에 갔다.
오전은 수업을 준비하며 한국 선생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점심쯤 집에 와서 함께 밥을 해 먹는다.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찾아왔다.
1시간쯤 초급반 3명의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을 했다.
10살 12살의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무척 잘 따랐다.
보름이, 향기, 햇살이 한국어 이름도 지어주고 같이 K팝 뮤비를 보기도 하며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3시~4시쯤 다시 돌아와 마당에서 그네를 타거나 나무에 열린 살구, 체리, 플럼 등의 열매를 따 먹었다.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지내게 되며 함께 저녁 식사를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루가 잘 갔다.
치열하지 않아도 참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났다.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아이들을 만나 한국어를 가르쳤고,
다른 팀의 일을 돕기 위해 계절마다 캠프 등에 따라다니며 봉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한국에서의 치열한 삶에 비하면 긴 휴식을 취한 것만 같은 그런 시간이었다.
초반에는 할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 왠지 우울한 기분에 그네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나한테 일을 좀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치열하지 않은, 나에게는 낯설기만 했던 느린 템포의 삶이 나에게 필요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경험한 '여유'는 나에게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 보게 했다.
직접 생활한복을 만들어 입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요리를 해보기도 했다.
베이킹을 하여 학생들, 동네 주민들과 나눠 먹기도 하고, 뜨개질로 커다란 숄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과일들을 따서 잼과 주스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여름에는 5,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서 캠핑하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은 나를 확실히 변화시켰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나는 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변했고,
낯선 땅에서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강해졌다.
우물 모터 고치기, 쥐 잡기, 두꺼비집 교체하기, 터진 연통 교체하기, 석탄 난로 떼기 등등
한국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며,
생존을 위해 어떤 문제든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내려 하였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 점점 더 단단해졌다.
엄청난 각오를 품고 떨리지만 결연하게 비행기에 탔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한층 여유롭고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변한 내가 마음에 들었다.
남기고 가는 일들, 사람들이 아쉬웠지만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타국에서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