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휴식을 마치고 귀국한 지 7일째 나는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귀국 3일 차, 소속되어 있는 봉사단체에 복귀 인사를 하고 상담을 진행하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기에 일을 하며 대학원을 다니고 싶단 이야기를 했더니 보육원 일을 하며 대학원을 다니는 지인이 있다며 보육원을 진로로 추천해 주셨다.
보육원? 생활시설 쪽은 알아본 적이 없었지만, 아이들을 만나는 곳이면 다 좋았던 나는 한번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귀국 4일 차, 취업사이트에서 보육원 공고를 보았다.
2교대 근무로 운영되는구나, 여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는 생각으로 당일에 이력서와 자소서를 써서 지원을 해보았다.
해외 봉사를 다녀온 2년여 동안 쉬었기에 첫 지원에 바로 합격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귀국 5일 차, 언니의 이사를 돕던 와중에 전화가 한 통 왔다.
오늘 오후 면접이 가능하냐는 연락이었다.
(아마도 이날은 토요일이었을 거다. 면접 연락을 받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사를 돕던 차림새에 다 해진 운동화 차림, 급하게 언니 옷을 얻어 입고 신발은 포기한 채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누가 봐도 나를 좋게 보고 있는 듯한 면접관은 바로 원장님 면접까지 진행하자며 나가셨고, 원장님이 들어오셔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곤 바로 채용이 됐다.
아마 사람이 급했었나 보다.
귀국 7일 차, 그렇게 나는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아가방에 있었다.
36개월이 채 되지 않은 8명의 동갑내기 남자아이들이 나를 향해 '이모' '이모!' 하루 종일 불러대니 가끔 내가 어디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혼미할 지경이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되었고 음식과 물이 달라지니 장도 말썽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점은 너무나도 입에 잘 붙어있던 현지어가 떨어지지 않아 아이들에게 한국말과 외국말을 섞어 쓰고 있단 점이었다.
'귀띱뚜르~(기다려~)'
3~4살짜리 남자아이 8명을 키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는 뼈저리게 경험으로 배울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8명의 아이들을 만난 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목소리 작고 수줍은 소녀에서 목청 큰 든든한 슈퍼 이모로 거듭난 것이다.
사랑에 목이 마른 아이들은 빠르게 나를 양육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마음 깊이 품을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도 나도 참 괴로웠다.
바로 하루 뒤 만나게 될 터였지만 매일 한바탕의 눈물 파티가 벌어졌고, 나 역시 아이들을 놓고 가기 힘들어 가끔은 퇴근 시간을 1~2시간 넘겨서까지 아이들과 놀아주곤 하였다.
(나뿐 아니라 모든 선생님이 출퇴근할 때마다 눈물 파티가 벌어지곤 했다)
출근하는 날이면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보육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뛰어가다시피 하곤 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