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어지럼증은 갈듯 안 갈듯 출현했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어지럼증은 특히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지하철, 버스, 차 등 움직이는 기계 위에서 더욱 심해졌다.
날씨의 영향도 있었다.
비가 오면 유독 심했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한 날은 연차를 내고 쉴 수밖에 없었지만, 나머지 날들은 난간을 잡고 다니면서라도 출근했다.
내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이 당장 없다는 걸 알기에 이 악물고 출근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가나 싶었던 어느 가을 나에게도 코로나가 찾아왔고,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격리기간은 7일, 도무지 회복되지 않는 내 상태에 입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병원에 문의해 봤지만, 팬데믹에 고위험군이 아닌 30대 감염자가 입원할 자리는 없었다.
격리기간 7일이 지난 후 도무지 출근이 불가할 것 같아 회사에 문의하였더니 역시나 격리기간 7일 이후부터는 병가가 불가하니 개인 연차를 사용해서 쉬라는 답변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연차를 쓰고 병원을 찾았다.
격리기간이 끝났으니 입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였다.
실신이 반복되고 있었으나 병원에서는 격리기간 7일이 지났음에도 검사 시 코로나 양성이 나오는 상태이므로 입원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나는 연차를 쓸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특히 같은 팀 직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갑작스러운 코로나에, 격리 기간이 지났음에도 가지 못하다니….
그래서 4일 차 되는 날 나는 출근을 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이 악물고 버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하철역까지 엄마가 데려다주시고 지하철부터는 홀로 가기로 했다.
괜찮을 것 같다며 걱정하는 엄마를 보냈지만,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과정에서 극심한 어지럼증으로 내려서 바로 주저앉았다.
구역질이 나오고 눈앞이 노래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차가운 지하철 바닥에 엎드려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에 전화하는 것이었다.
나 : 대리님…, 저 지금 지하철인데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리님 : 알겠어요. 그런데 앞으로 인사 관련 건은 센터장님께서 본인에게 직접 보고해 달라고 하셨으니, 센터장님에게 전화하셔서 한 번 더 보고해주세요.
나 : 네 알겠습니다….
나 : 센터장님…, 000 주임입니다…. 현재 출근 중인데 지하철에서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센터장 : 알겠고, 그럼 오늘 본인 연차 쓴단 말이죠? 연가 몇 개 남았는지 잘 체크하세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지하철에서 쓰러질 것 같은 때는 구급차를 부르거나 도움을 청하는 게 먼저였을 것 같은데 나는 미련하게도 회사에 두 번이나 전화하고 나서 쓰러졌다.
센터장의 말은 마음에 꽤 오래 박혔다.
'병가가 없어 아파도 연차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서러운데 꼭 그렇게 말해야 했을까?',
'센터장님 입장에선 코로나 7일에 4일 연차니, 인력비는 게 싫으실 수 있지….',
'내가 너무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지금 퇴사하겠다고 할까? 그럼 진행되던 일들은 누가…? 당장 누구를 구할 수 있나…?'
병원 천장을 보고 누워있으면 참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나는 회사에 혼자 다닐 수 없었다.
처음엔 누군가 데려다줘야만 출근할 수 있었고, 이후로는 30분에서 1시간 일찍 나와 조금씩 쉬어가며, 주저앉아 기다려 가며 이동했다.
원래도 아리송했던 나의 어지럼증은 코로나 이후 더 알 수 없는 양상으로 가고 있었다.
병원마다 말이 다르고 정확한 진단은 어디서도 받을 수 없었다.
병가가 없으니 안 좋은 날은 연차를 내고 쉴 수밖에 없었으므로 연차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퇴사 고민을 여러 차례 했었다.
처음 아팠을 때도 팀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내가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이후로도 계속 반복되는 어지럼증과 코로나로 인한 치명타로 내가 하차하는 게 맞지 않을까 여러 차례 고민했었다.
그때마다 팀에서는 내가 퇴사하면 팀의 업무를 다 아는 사람이 없어 안된다며 만류했고 나 역시 열심히 회복하며 버티려고 하였다.
하지만 온갖 좋다는 약과 비싼 한약을 지어 먹어도 그때뿐이었다.
동료들에게도 미안했지만 나를 더 괴롭게 했던 건 곧 남편이 될 나의 남자친구와 가족들이었다.
코로나로부터 6개월이상 지나고, 어지럼증은 여전히 가끔 찾아왔으나 강도나 지속성이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야근을 줄이고, 건강하게 먹고, 한약과 양악, 모든 수단으로 건강해지려 노력했다.
그 사이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나의 삶도 다른 주기를 맞이할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랫동안 천천히 준비했던 나의 결혼식이 있기 전 마지막 주, 긴 신혼여행을 앞두고 나는 앞선 2주간 계속해서 야근했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걸 알았지만 나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동료를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가야 했다.
인수인계를 꼼꼼히 해놓고, 내가 없을 때 있을 일들을 모두 미리 준비해 놓고 가라는 윗선의 당부가 있었으니, 자의 반, 타의 반 야근이었다.
2주간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 있을 일들을 일자별로 인수인계서 작성을 해두고, 당길 수 있는 일들은 다 당겨서 해두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구토와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아, 안되는데…. 다음주가 결혼식인데….'
온 집안이 왈칵 뒤집혔다.
예비 남편은 '결혼식을 앞두고 이렇게 일을 주는 회사가 어디 있냐?', '그 회사는 네가 없는 2주도 버티지 못할 회사여서 그 일들을 다 미리해놓고 가라고 하냐!'며 화를 냈고, 가족, 친구, 지인 할 것 없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고 난리였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같이 코로나에 걸려서도,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나 때문에 고생하며 마음 아파하던 엄마의 말들이었다.
결국,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억지로 버텨가며 일을 할 몸과 마음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계였다.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만큼 너무 아쉬운 엔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속상해하는 가족들도, 쇠약해져 가는 나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저는 여기서 하차합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일했던 6번째 직장에서 하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