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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품, 관심은 대단하나 남겨놓은 이름은 미약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15화)

by 오해영

전통 시대 4대 사치품은 금그릇 은그릇 구슬 보석등이었다. 이 사치품을 백성에서부터 양반 그리고 왕실까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했다. 이런 사회현상은 고대 사회 문화를 관통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 사치품은 신분이 높은 계층이나 부자들이 소유함이 일반적이었고 백성들은 관심만 둘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금은보석에 관한 기록과 이야기는 많으나 지명에 영향을 남긴 경우는 다른 광물보다 적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특정 계층이 주로 소비하므로 왕실등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거나 비밀에 부쳐졌을 것이며 원료 채취와 가공도 특정 지역이나 소수의 숙련된 장인들이 담당하여 백성의 일상생활과 별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금광은 산동반도 동부의 연태 소원 래주 치박일대였다. 그러나 지명과 연관되는 경우는 현懸급 이상은 눈에 띄지 않고 마을 정도의 이름(향 진 촌)에서 금 글자가 들어간 사례를 볼 수 있다.


지명에 영향력이 낮은 이유로 산동반도 지명은 많은 경우 진나라 이전부터 생겨났으며 유교문화의 정립과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사천성 금천현 소금현은 수隋 시대에 이름이 지어졌는데 황금이 나오는 대금천과 소금천 유역에 있다. 청나라 중앙정부에서 지역 관리를 강화하려 황금을 통제하자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소금천 부근 운귀고원에 금사현이 있는데 사금을 흘러가는 물에서 채취하는 방식에서 연유한다.


만주지역에 금 글자 가진 지명으로 금산둔屯구가 있다. 강서성 서금시는 당唐 말기 금을 캐는 광산에 감독기구 두었는데 남당南唐 시기 서금현이라고 이름 지었다.


백은도 지명에 적게 남아있는데 요령성의 경우 철령시 은주구가 유일하다. 복건성 광택현의 경우도 당唐 초기 은 품질이 양호하여 광택향이라 하다 북송 초기 현으로 승격되었다.


진주로 이름 얻은 지명중에서 안휘성 방부시와 광동성 해주구가 있다. 방부시는 진주생산에서 유래하며 해주구는 주강 입구로 진주 교역 중심지였다. 해주구에 은주석에 관한 전설에서 있는데 당나라 때 아라비아 상인이 해주를 가지고 가다가 부주의로 물에 빠뜨려 돌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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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슬은 정을 표시하는 매개품이었고 부패하지 않아 신선에게 드리는 제사와 고귀한 신분자의 장례의식에 사용되었다. 또한 옥은 온유하고 부드러워 군자의 높은 덕행을 비유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4대 옥으로 독산옥 화전옥 남전옥 수옥을 들 수 있다. 화전옥은 신장지구 화전현에서 생산되는데 화전(고대 우전)은 몽고어로 아름다운 구슬 땅의 음역이다.


남전옥은 푸른 색깔을 띠며 섬서성 남전현에서 나온다. 수옥의 수는 광활하고 빛나는 산에서 나는 미끄러운 산석의 뜻이며 지명으로 요령성 수암 만족 자치현이 있다. 그런데 허남성에서 독산옥이 나지만 지명은 없다.

그리고 곤륜산에서 옥이 많이 나왔다. 화전현 흑옥현 모두 옥과 연관된 지명이다. 한무제는 전설상의 곤륜산을 신장지역 고산으로 위치를 정하였다. 그래서 곤륜과 옥은 서로 같은 곳을 가리키게 됐다. 그리고 곤륜산 옥은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줘서 비단길을 그 이전에는 옥석길이라 불렸다. 감숙성 옥문시 옥문관은 옥 무역 사례를 보여준다.


강소성 곤산은 옥의 산지로 부근에 있는 강에 안개가 일어나면 봉래산 신선이 곤륜 옥을 들고 있는 느낌을 우러나게 했다고 한다. 안휘성 숙주시 영벽현도 옥 산지에 신선 기운이 일어나곤 하여 령靈과 옥이 함께한다고 여기게 되어 그리 불렸다.


그런데 금은옥이 생산되지 않은데도 지명에 연관이 있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강서성 옥산현 대만의 옥산 산서성 백옥현에서는 옥이 나오지 않는다. 영하지역 은천시는 황하의 물이 호수처럼 백색 광채가 나고 겨울철 하란산과 평원에 눈이 쌓이면 온 대지가 은을 장식한 것 같아 은천 이름을 얻었다.


감숙 백은시는 금속공업지구가 있어 1956 개명되었으나 백은이 산출되지 않고 백은은 몽고어인 부유의 음역이다. 강소성 회안시 금호현도 호수의 표면에 일어나는 금빛 광채를 일컫는다.


사치품지도.png


한반도의 경우


금은보석은 지배층의 신분 지위 부를 상징했고 보석은 주술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왕조의 체계가 잡혀감에 따라 복식에 까지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신분에 따른 금 은 보석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특히 금은 산화되지 않는 불변의 성질과 광택이 뛰어나고 희귀하여 더 귀중한 대우를 받았다.


금은보석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전국적으로 금곡 금동 금천 등 금 글자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부는 금광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김포의 경우 고려 시대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길가에서 주운 금 덩어리로 형제애를 저해할까 봐 한강에 버렸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다. 은의 경우 광산 주변의 작은 마을 이름이나 자연 지명에 은 글자가 포함된 경우가 상당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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