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금, 부엌의 맛에서 강토의 이름으로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16화)

by 오해영

고대에 청동과 금은보석은 상층사회나 통치자의 사용물품이라면 소금과 철그릇은 사회기층 백성의 생활필수품이었다. 농사에 필요한 수리시설과 씨 뿌리기는 철기 없으면 될 일이 아니었으며 소금은 이들이 먹고 살아감에 반드시 갖춰야 할 조미료이었다.


이런 역할로 소금과 철은 과거 농경 국가 운영의 기초였으며 왕조의 통치자는 염철업의 생산과 판매를 직접 관장하였고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서 발생하는 세금은 국가의 재정과 통치력의 수단이 되었다.


중국의 경우

소금은 백성들의 부엌에서 제일 중요한 조미료로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도 할 수 없는바 고대 왕조는 소금 관리를 경제사회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진한秦漢시기 이래 소금에 대해 관官에서 전업으로 영업하였고 당송唐宋 시기가 되면 소금과 철의 생산장소까지 운영관리하였다. 명청明靑시기에 이르면 국가 재정에서 소금과 철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척 높아졌다. 심지어 소금을 판매하는 상인(진상 화상)으로부터 나온 세금으로 나라를 운영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소금의 채취방식은 해염 정염 지염 암염등 4종류가 있었다. 해염은 바다와 연접한 지방에서 생산되었는데 강소성 염성시 하북성 염산현 대만 고응시 염정구 심천시 염전구 절강성 해염현의 이름은 이 염전방식에서 유래되었다. 복건성 석사시는 해염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석사(돌사자) 부근에 모여서 교역을 하다 보니 생겨난 이름이다.


정염은 지하에서 염수를 퍼올려 소금을 얻는 방식인데 운귀지역에 연관된 지명이 많다, 운남성 소통시 염진현 사천성 지공시 공진구 정염현 염정현 염원현등의 지명을 들 수 있다.


지염은 연못의 염수를 햇빛에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인데 서북지역에서 주도 쓰였다. 영하자치구 염지현 산서성 운성시 염호구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사천성 부순현은 북주시기 소금관리를 위해 현을 설치하였으며 부는 소금으로 부자 된다는 뜻이다.


호북성 염회시는 관우나 손권 통치기에 소금 영업을 감독하는 기관을 설치했다가 좀 지난 후 동오 정권이 염회현으로 승격시킴에서 유래한다. 강소성 동태시 광동 동완시는 한당漢唐시기 소금업을 관리위해 파견한 감독관을 동태감이라 지칭함에서 나온 지명이다.


심천 보안구도 동오 정권이 설치한 관리기관인 염도위를 동진시기 군치소로 이용함에서 유래하였다. 산서성 운성시는 지염호에서 소금을 채취하고 운반하려 설치한 염운사 성운의 약칭이다.

소금지도.png


한반도의 경우


반도 지형 특징을 활용하여 해염을 생산하였는데 고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소금 제조 방식이었다. 갯벌에 바닷물을 유입시켜 햇볕으로 어느 정도 증발시킨 후 가마솥에 붓고 땔감으로 장시간 끓여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역대 왕조는 소금이 백성들의 음식조리에 필수품임을 인식하고 제조와 관리를 국가가 직접 통제하여 재정 수입을 확보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염세는 국가 재정수입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관련된 지명도 상당하였다. 남해안 염전지대에 소금 나루터의 뜻의 염포가 많았으며 마산 염포에는 국가 염전이 있었다. 서해안 염전에서 채취한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였던 염창동은 소금창고의 역할을 했으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아 염리동이라 했다. 울산 염포동 창원 염포동 통영 염포리 등은 소금 출하 항구이었다.


소금 웅덩이를 뜻하는 지명도 여기저기 보이는데 무안의 염전리 강화도의 염지리를 예로 들 수 있다. 현 단위 지명으로 영광군에 염산현이 있었다.


소금은 단지 음식의 맛을 내는 재료뿐만 아니라 백성의 식탁에서 출발하여 나라의 재정을 지탱하고 마침내 땅의 이름으로 남았다. 지명의 염 글자에는 옛사람들의 삶과 통치의 의도가 스며있는 흔적으로 소금은 시대의 기억을 지켜왔다.

keyword
이전 15화사치품, 관심은 대단하나 남겨놓은 이름은 미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