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제 제18화)
원시 시기 사람들은 생활터전 주변에 대해 일정 지식을 반드시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만 지속적인 생존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디를 가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 어떤 지역에 가야 사냥을 하며 어디에서 식물의 과실과 뿌리를 채취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수렵시대의 모습이다.
인류는 비교적 안전이 확보된 높은 나무에서 생활을 떠나 대초원으로 옮기면서부터 야생동물을 수렵하여 식량으로 삼았다. 이들은 부단한 탐색과 개발로 이런 지역을 삶터로 바꿨으며 이 과정에서 그들이 기억해야 할 동식물이 무엇인지를 공간에 표기하였다. 이들을 따라가 보면 동식물 주제의 지명여행이 된다.
지명에 표기되어 있는 야생동물 중에서 호랑이는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는다. 중국 동북아 산림지역의 만주 호랑이와 화남지역 호랑이는 오랫동안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자리를 점유했다.
그러나 사람과 생활공간 쟁탈등으로 어느덧 생태적 지위는 약해지거나 없어져 버렸다. 단지 어떤 지역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표기하고 접근에 유의하도록 경고를 하였다.
오늘날 무척 많은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장강 삼각주 지역은 화남 호랑이를 잡는 수렵장이었다. 이들 지역의 지방지와 옛사람들의 글에서 호랑이를 많이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강호구에 호랑이 10여 마리가 살고 있었다거나 소주의 호구 지명은 송나리 시기만 해도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언덕 구 글자를 사용했다 한다.
항주시 영은산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그 지역을 호림이라고 불렀는데 당나라 건국자 이연의 아버지 이름 이호 인지라 이를 회피하여 호림을 무린으로 개명하였는데 나중에 영은으로 또 이름이 바뀌었다.
명청왕조 이래 대규모 수렵으로 강남지역 호랑이는 청왕조 중기에 이르면 소실되고 단지 강남지역 100여 개소의 지명에 호 글자가 스며든다.
그런데 청나라 말기 1902년에 이름 지은 흑룡강성 호림시에 오히려 호랑이 없는데도 호 글자가 사용되고 있다. 지명의 변화 과정을 보면 우수리강 주변 희총림이라는 이름이 칠호림으로 바뀌고 다시 호림으로 글자 숫자가 간략화되었다 한다. 동북지방 진정한 호림은 흑룡강성 목단강시의 해림시이다.
사람들에게 경외를 일으키는 호랑이에 비해 사슴은 성정이 온순하고 태도가 우아하여 상서로운 짐승으로 인식되었다. 또 재산아 많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무제 시기 사냥터인 상림원의 흰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백록화폐가 있었는데 가격이 매우 비싸 40 만전이나 되었다.
절강 온주시 녹성구도 흰 사슴과 관련 있다. 동진 시기 어느 문인이 영희성의 축성을 축하할 때 흰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꽃을 옷에 장식하고 영희성을 지나갔다. 그 이후 사람들은 흰 사슴의 상서로움을 기려 백록성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수렵의 대상이 아닌 종교의식의 중요 제물로 여겼다. 노자 고향인 무평을 수나라 시기 녹읍으로 개명했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춘추시기 진陳국의 도읍지로 사슴이 많아 녹 글자를 사용하여 녹읍이라 함에 기인한다.
먼 옛날 사슴을 사냥할 때 보면 행동은 매우 민첩하고 생포하여 여러 마리를 함께 가둬두면 서로 충돌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래서 사슴들은 많이 놓아두면 어떤 배열을 하여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군중이 일어나 할거하고 빼앗은 상황을 축록이라는 말이 대신하게 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사슴 녹자 관련된 유명한 지명은 정도는 다르나 전쟁과 관련이 있다.
하북성 장가구시 거록현은 항우가 매우 열세임에도 강한 진秦 나라 군대를 무너뜨려 진 나라가 망하는 결정적 게기를 제공한 장소가 되었다. 거록은 아주 먼 시기 대륙택 호수 이름이 유래하는데 경내에 백록천의 지명이 있다.
석가장시 녹천구는 사슴 녹鹿과 록祿이 같은 음이고 안녹산의 난을 징계하는 의미로 확녹현으로 개명하였다, 안녹산을 체포하다의 의미이다.
호랑이는 한반도인의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그 내용이 지명에 스며들었다. 우리나라 지명에 호랑이 관련 지명은 상당히 많다. 약 390여 곳으로 전남 경북 경남에 주로 분포한다. 또 마을 명칭이 대다수이며 그 뒤를 이어 산 이름 고개 이름 바위 이름이 뒤따른다.
포항시 호미곶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나타내며 고흥의 복호산과 연기군의 범직이는 뒷산의 지형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마을을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설화와 관련된 지명도 있는데 횡성군 저고리골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옷만 남겨놓았다 한다.
호랑이는 잡귀를 물리치는 신성한 영물이나 때론 재난을 초래하는 난폭한 맹수로 여겨졌다. 또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의리 있는 동물이며 골탕을 먹일 수 있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동물로도 표현됐다.
사슴은 신의 사자 신의 의지를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옛사람들은 사슴이 하늘의 뜻을 전해준다고 인식하였으며 흰 사슴을 잡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으로 믿었다. 수사슴의 뿔 형상은 다른 동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워 신라시대 왕의 관모가 사슴뿔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전설도 있는데 길에서 흰 사슴을 잡은 동명왕이 이웃 나라인 비류의 도읍에 비를 내리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흰 사슴을 윽박질렀다. 그러자 흰 사슴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하늘까지 울리자 하늘이 7일 동안 비를 내리게 하여 비류왕이 항복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슴의 수명은 길지 않은데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믿었다.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노원구 녹천마을은 중랑천과 우이천이 합쳐지는 강의 모습이 마치 사슴 머리에 난 뿔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