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는 있으나 경기성은 없다!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31화)

by 오해영

은 단순한 행정단위가 아니라 정복과 강제 통제를 전제로 탄생한 제도였다. 한반도의 도道에 해당된다.


수천 년 동안 한반도의 지방행정체제는 중국과 유사하여 중국에서 어떤 조직이 설치되면 시간을 두고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바로 도주군현이다. 그런데 유독 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어떤 이유가 있을까?


성의 속성은 강탈이다


의 출현과 성격

몽고(원) 제국의 지방행정제도는 금나라의 시스템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 연유로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금 왕조를 무너뜨려 차지하고 유목으로 삶을 꾸리는 생활방식이 비슷함을 들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 원나라는 지방행정을 조정했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행성(행중서성) 설치였다. 현재의 성이다.


몽고의 성장은 주변 국가의 정복에서 그 본질을 읽을 수 있다. 그 당시 전쟁 지휘와 점령지역의 관리가 중요하였는데 금나라의 방식을 응용한다.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는 비농경 생활방식에 소수민족임에도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인구 대국인 북송을 정복하고 관리한 경험을 주시하였던 것이다.


바로 행정업무 기관인 행대중서성行臺尙書省(행중서성)과 군사권을 가진 행추밀원이다. 이곳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원제국도 새로이 정복한 지역의 관리를 위해 행중서성(또는 행상서성)을 설치하는데 책임자에게 행정권에 군정재軍政財의 권력까지 부여하여 한 손으로 지방을 강제로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지위는 금나라의 경우 보다 매우 높아져 중앙조정의 재상급에 상당했다. 행성에는 중앙조정처럼 승상을 둘 수 있었다.


그렇지만 행성의 주 역할은 성이하 지방행정기관의 관리였다. 층층구조(심할 경우 5층)로 조직하고 직상급에게만 보고하게 하여 중앙조정과 직접 연결을 못하게 통제했다.


예전 행정구획의 기준을 배격하다

원왕조 이전에 지방행정을 구획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산천지리였다. 진령 회하 장강 황하등 큰 강과 산맥이 일반적인 기준이었다. 그리고 명산대천은 동서방향으로 펼쳐 쳐 있다 보니 최상급 지방행정단계는 자연스럽게 동서방향으로 길게 구획된다. 예를 들면 당 나라의 도의 형태는 횡 방향이 길고 종 방향이 짧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 원제국 시기에 배제된다. 과거 한의 주, 당의 도, 송 구획방법이 무시된다. 원나라의 성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다. 이는 행성의 역할이 정복이었기에 산과 강의 험준함에 경계를 삼기보다는 군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북에서 남측 방향으로 길게 구획하였다.


행정구역의 경계를 서로 얽히게 하다

원나라 행성의 권력은 무척 강했고 관할지역은 광활하여 조그마한 성일지리도 수십만 평방㎞나 되었다. 행성을 구획할 때 할거 가능성을 살펴 예방할 만한 땅을 의도적으로 관할이 다르게(견아상입)하였다.


예를 들면 섬서성에 한중지역을 포함시켰는데 한중은 남측 변두리의 진령산맥 너머에 있는 지방으로 사천성에서 관리함이 산천지리에 부합되었다. 이런 한중을 섬서성 관할하에 두어 사천성의 힘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원제국 말기에 이르러 성의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자 군대의 방위 역할이 약해져 농민군의 반란을 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현縣이 함락되면 부府가 흔들리고 부가 깨지면 성이 약해져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원나라의 지방행정 제도는 실패했으나 견아상입 원칙은 명청시기에도 계승된다. 예를 들면 주원장은 하남의 관할구역을 황하의 북쪽 땅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이처럼 행정구역을 계획할 때 할거를 막을 수 있는 지역을 고려하였다.


성 제도가 한반도에 유입되지 않은 이유


한반도의 지방행정 시스템은 중국과 유사하였음에도 성의 경우 고려나 조선에서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강탈

한반도의 자연지리는 중국의 경우와 많이 다르다. 중국의 큰 산과 강의 흐름은 보통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리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또한 강물의 흐름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그래서 겨울철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과 여름철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비구름은 동서로 뻗은 장애물에 부닥쳐 산하의 북쪽과 남쪽의 자연지리가 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달리며 중소 규모의 산맥은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쪽 또는 서쪽 방향으로 위치한다. 그러하다 보니 겨울에 북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이나 여름철 남측에서 불어오는 비구름은 자연의 장애를 받지 않고 한반도 전 구간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산천지리에 맞춰 삶터가 여기저기 그리 크지 않게 꾸려졌다. 그리고 이들을 총괄하는 힘이 강한 공동체 필요성도 높지 않았다. 행정체제가 발달한 중앙집권제 왕조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남아있어 중앙조정이 일방적으로 지방을 강압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또한 상당한 인구가 중국이나 만주로부터 유입되었지만 중국처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른 종족이 유입되지 않았다.


이러한 자연지리와 인문지리의 특성으로 중앙조정이 지방행정 체제를 계획할 때 강제력을 중국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강탈의 성격을 띤 성의 체제는 부합되지 않았다.


중화주의

성이라는 지방행정체제 확립은 한족이 아닌 여진족과 몽고족이었다. 이들은 한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였기에 지방을 강하게 통제함이 현실적으로 필요하였다.


이 시기의 한반도의 지배계층은 한족의 행정시스템과 유교(성리학) 문화에 깊게 빠져 있었다. 한족의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 의식에 크게 물들어 있어 성의 제도에 반감이 컷을 수 있다.


정동행성의 부정적인 기억

정동행성(정동행중서성)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 목적으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고려를 원제국의 한 지방으로 보고 이를 관리하는 역할로 변했다. 원제국은 이 행성을 통해 고려에 내정간섭을 한다. 그 와중에 고려에 끼친 나쁜 영향과 감정이 쌓여 행성제도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종합하면

한반도는 중국처럼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 형태의 국가가 아니므로 성省체계보다는 도道 단위의 지방행정 구조에 더 적합했으며 우리 형편에 맞게 이미 정립된 행정세스템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