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것도 못 봤어

하준이와 할머니가 함께 그리는 제주이야기/오름투어

by 동숙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면 그때서야 나무가 얼마나 기특한지, 꽃이 얼마나 예쁜지 저절로 알게 되지요. 길을 걷다 마주치는 나무와 꽃, 풀, 사람 들이 모두 애틋해지는 감정을 일곱 살 하준이가 이해하긴 힘드니 지인들의 추천경로인 올레길 보다 다른 대안이 필요했어요. 신나게 놀면서도 뽀끼뽀기숲의 도깨비들처럼이나 심심하단 말을 심심찮게 내뱉는 아이에겐 한두 시간 정도 성취감을 느끼며 즐기는 여정이 필요했고, 그 요건에 들어맞는 게 바로 오름투어였어요.


"하준아! 옛날옛날에 제주도에는 용들이 아주 많이 살았단다."

"지금은 용들이 없잖아."

"왜냐면 용들이 오름으로 변신해서 그렇대. 그러니까 오늘 하준이가 용기사님이 돼서 오름을 정복하는 거야!"


오늘은 오름 데이예요! 달산봉, 백약이오름, 따라비오름, 다랑쉬오름!


산책 가듯 오르는 달산봉


신산리에서 가까운 하천리 달산봉은 내내 갸우뚱 의심하며 찾아가야 하는 길이에요. 그만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오름이라기보다는 작은 동네 뒷산 같은 느낌입니다. 달처럼 생겨서 달산, 달산봉수대가 있어서 달산봉이라고 불린대요. 하준이와 오르는 첫 오름으로 만족스러운 산길이에요. 지그재그 산둘레길에다 길 전체에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어 하준이가 내내 일등 선두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자분자분 오르기 편해요. 7살 하준이 걸음으로 왕복 한 시간입니다. 자금우와 백량금 군락지라서 빨간 보석들이 불을 켠 듯 어여뻐 눈호강 산길입니다.


달산봉 숲길

자분자분 걷다가

뚤레뚤레 숲을 훑는 내 눈과

숲 가장자리에서

똥 누던 할아버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비도 얼음

내 눈도 얼음

닿을락 말락 할아버지 엉덩이도 얼음

난 아무것도 못 봤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20×20/캔버스에 아크릴


두 번 오른 백약이오름


백약이오름으로 향하는 길엔 흑염소, 말 들이 함께 따라나설 듯 쳐다보는 통에 가다가 멈추길 반복해요. 느슨한 길 걸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하준이는 핑크카메라로 차를 멈춰 세우고 사진작가로 거듭나는 중입니다.


백 가지의 약초가 자생한다는 백약이오름이라 하니 하준이는 튼튼해지게 뛰어가야 한다며 일곱 살 체력을 과시합니다.


"나는 용기사다!" 양손에 쥐어준 긴 억새풀 두 가닥을 신나게 휘두르며 한 바퀴 돌다가 풀들이 누워있는 걸 보더니 바람이 자꾸 흔들어서 나도 힘든데 억새도 나처럼 힘들어서 누운 거 아니냐고 억새 걱정을 합니다.


백약이오름에는 화장실이 없지만 주차는 여유로우며 가끔 과일트럭이 상주하여 비타민의 즐거운 투여가 가능합니다.


백약이오름


오름의 여왕, 따라비오름


오름의 황제가 다랑쉬오름이라면 오름의 여왕은 따라비오름으로 제주도에 있다는 368개의 오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오름이에요. 긴가민가 싶은 길을 꾸역꾸역 따라가다 보면 제법 넓은 주차장이 나옵니다.


김영갑 갤러리모두악의 사진작가 김영갑도 담아낸 따라비오름이에요. 정상에 오르면 그야말로 여기저기 감탄사들이 산봉우리 사이를 날아다녀요. 세 개의 둥근 봉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는 환상의 산길, 중간중간에 돌탑의 예술미까지 더해져 아름다운 풍광은 쉼 없이 펼쳐집니다. 하준이가 데굴데굴 굴러도 탈 나지 않을 부드러운 억새의 감미로운 곡선, 진정한 오름의 여왕이에요.


따라비오름


오름의 황제, 다랑쉬오름


일요일 아침에 즐겨보는 프로그램 <산>에 다랑쉬오름이 나오는 걸 보고는 "할아버지, 우리가 제주도에 온 걸 텔레비전이 아니 봐? 제주 용들이 변신한 다랑쉬오름이 나와." 무척 신기해합니다. 하준이가 좋아하는 고모할머니 네 분이 제주에 오시자마자 제일 먼저 가야 한다며 하준이가 앞장서 오른 곳이 다랑쉬오름이에요.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황제답게 전시관과 화장실, 주차장이 잘 갖춰져 있어요. 정상에선 한라산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고 해요. 순한 모습으로 사람 가까이에 솟아오르니 최상의 벗, 오름이란 걸까요? 오름 데이 덕에 무럭무럭 신선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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