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소임에 충실한 여름의 애씀으로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이지만 심심한 것보다야 더운 게 나을 테니 근처 공원 산책길에 나섭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배롱나무꽃들도 숨죽이고 있는 공원 주차장엔 차들도 보이지 않아요. 주차장에서 숲까지 뙤약볕길을 한참 걸어야 닿을 거리라 한숨만 나오는 참인데 멀리 숲에서 동물들 무리가 알짱대네요. deer가족인 듯해요. 안 올 거야? 우아하게 뒤돌아서는 모습에 반하여 뙤약볕길을 걸어 숲으로 들어갑니다. 숲 진입로 표지판조차 햇빛에 바래서 코스 난이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란 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숲이란 걸까요? 그만큼 여름의 열기에 취약하단 뜻이겠지요.
그러나 숲에 들어서자마자 나무그늘이 바람길을 열어줍니다. 까뮈가 색을 희망이라 말했다면 이 초록을 뭐라 부를까, 생각하며 걷게 되는 초록지천인 숲길이에요.
산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산길이 있고, 호수를 도는 물길, 다른 산과 연결되는 깊은 숲길 등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산둘레길을 걷기로 했어요. 다리 아플 즈음이면 나타나는 나무의자가 대개 망가지거나 벌레집이 돼 있어서 서서 간식을 먹어야 했지만 더위가 가시는 숲그늘은 견딜 만했고, 덕분에 눈도 맑아지는 기분이었어요. 이따금 나뭇가지 위에서 쳐다보는 다람쥐와 멀리서 쳐다보는 동물들로 은하수는 활기를 찾았어요.
울퉁불퉁 바위들이 올라올 테면 올라오라고 겁을 주는 둔덕을 바라보다가 하늘이가 한 마디 해요. "구름산 같지 않아?"
하늘이와 나에게 구름산이란 아주 특별하거든요. 중 3 겨울방학에 뜬금없이 비행기 정비사가 되고 싶다고 진로를 정한 겁니다. 그러고는 공부도 체력싸움이니 권투를 하겠다고 뒤퉁수를 친 거예요. 막을 일은 아니다 싶어 응원하다 보니 어느새 전국에서 열리는 권투대회를 함께 뛰는 엄마매니저이면서 트레이너가 되어있던 겁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체전 복싱시합을 준비하느라 아침 6시에 모녀가 수없이 올랐던 산이 바로 구름산이었거든요.
엄마는 천천히 뒷짐 지고 오르고, 운동하는 딸은 지그재그 왔다 갔다 반복하며 산길에서 체력연습을 했었기에 구름산 하면 눈물밖에 생각이 나질 않아요. 결국 하늘이는 결승전에서 눈을 다치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권투를 접어야 했어요.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눈을 다쳐 권투를 그만둔 김에 공부한다고 스포케인까지 날아가 비행기정비사 자격증을 따냈으니 엄마의 응원은 제대로 성공한 셈이지요.
이 모든 시놉시스가 강철체력 은하수를 키우기 위한 거였다며 하늘이는 13킬로 은하수를 안고 산길을 마저 돕니다. 여유롭게 걷던 숲길이 "안아 줘, 마미'란 복병을 만나면서 구름산 체력산행이 돼버렸지만 짧은 시간의 고행이어서 다행이었어요. 빨갛게 익은 나무딸기와 줄딸기 열매의 달달한 간식으로 금세 체력을 회복한 은하수는 블루테슬라까지 뛰어갔으니까요.
어디든 초록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사람을 기운생동하게 만들어요. 해밀턴 밀에도 구름산이 있으니 하늘이에게도 낯익은 추억의 장소가 하나 생긴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