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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숙 May 23. 2024

파란만장 세비야

9. 꽃다운푸른과 함께 그린 스페인/ 세비야

여행을 떠나면서 이미 많은 것을 벗어두고 왔음에도 스페인은 나의 결핍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세비야에서 사고가 터졌다.


1885년 문을 열었다는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과 빵 굽는 냄새에 이끌려 망중한을 즐기다가 순식간에 현금이 들어있던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네 사람 여행경비를 모아놓은 현금이 몽땅 사라졌다. 빵값을 치르자마자 벌어진 사고였다. 여행의 총무인 푸른이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니 옆 테이블 스페인 할머니가 자기돈 20유로를 줄 테니 울지 말란다. 극구 사양하니 근처에 있던 경찰을 데려다준다. 경찰은 이 많은 사람을 조사할 수 없으니 일단 경찰서로 가라 일러준다.


사실은 여정의 막바지라 잃어버린 현금은 거의 달랑달랑한 상태였으니 큰 대미지가 없었으나 소매치기를 당한 지갑이 아까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딸은 이렇게 된 김에 스페인 경찰서 구경이나 해보잔다.


꼬불꼬불 구글네비를 따라 찾아간 경찰서에선 주말이라 손이 달린다며 꾸물꾸물 일처리가 느려도 너무 느리다. 근데 여행자보험 역시 잃어버린 현금은 보호하지 않는 것이 팩트란다. 소매치기당한 지갑을 애초에 루이비똥지갑이라고 했더라면 그나마 도움이 됐을 텐데 우리 푸른인 손때 묻은 문방구지갑을 갖고 있었고 그걸 사실대로 얘기했던 거다. 유창한 영어 따윈 소용없었고 그저 서너 시간 스페인 경찰서에서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아니지, 이럴 땐 자고로 공자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공자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란 곤경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말이다.


모바일그림/세비야 경찰서 찾아가는 길

잊을 수 없는 사건과 잊을 수 없는 깨달음은 도통을 채우는 게 아니라 허기를 남겼다. 세비야에 도착하자마자 베어문 고작이라 속이라도 든든하게 채울 요량으로 맛집찾았다. 예약으로 차서 30분 만에 먹고 나갈 수 있다면 들어오라 엄포를 놓는다. 우린 15분 만에도 먹어치울 있는 상태이나 대개 삼십 분쯤은 지나야 요리가 나오는 스페인 식당이니 쿨하게 식당으로 이동한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며 불행은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길을 떠난 사람은 길 위의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기 마련인데 좀 전의 사고로 입맛마저 고장이 다. 강추했던 화이트상그리아는 달달한 얼음만 가득하고 그나마 연어요리는 굿이었으나 돼지고기 요린 돼지인지 전혀 구분이 안 되는 맛이었다. 공자에 이어 그윽한 마음으로 화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틱낫한의 말까지 되뇌며 허기를 메꾼다. 다 마음이 시키는 일이니 마음을 다독여 좀 전에 퇴짜 맞았던 식당에 저녁 만찬예약을 했다.


여덟 시 반에야 문을 연 맛집에 미리 줄 서서 기다렸다가 먹은 만찬은 세비야에서 울컥이라는 서러움을 다행으로 변신시켰다. 여기 식당의 웨이터들은 한국말이 능숙한 초로의 스페인 미남자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게 궁금해서 식당주인이 물었단다.

"너흰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여기가 블로그 맛집이거든."


누군가 처음 다녀간 식당의 요리에 반해 블로그에 올렸고, 그 다음다음 사람들이 그 블로거를 따라 그곳 괜찮네~하다가 스페인 맛집이 된 거라는 유래를 들려주며 엄지 척한다.


2천 년 전 시인 세네카의 말처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하는 동시에 죽는 법도 배워야 한다. 여행이란 삶의 축소판이다. 시작이 있고 과정과 끝이 있다. 우린 이미 과정을 지나쳐 끝을 향해 걷고 있으며 매번 처음처럼 걸음 하나하나에도 몰입하는 중이다. 끝이 좋아야 잘 산 인생이듯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번 여행에서 겪은 하나의 삶이 내 인생에 어떤 파편던질지 내심 기대에 부푼 세비야의 밤이다.


스케치북에 볼펜/숙소 창문에서 바라본 세비야 밤거리
스케치북에 붓펜/숙소 카페테리아

세비야에서 기차 타고 세 시간을 달려가야 닿는 마지막 여행지, 마드리드의 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또 기대를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여정의 오류가 남아있기를 바라며~


모바일그림/세비야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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