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단지를 기점으로 반대쪽으로 나가면 기획개발된 신도시이고 그 반대쪽은 이주민들이 사는 동네인데 아무래도 번화가 쪽으로 나가자면 화려하고 멋있기는 하지만 물가가 저렴하지는 않고, 이주민 동네로 들어가면 물가가 싸고 맛있는 밥집과 재래시장, 채소 가게들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나는 당장 가방형 캐리어 시장바구니를 주문해서 배송을 받고, 평소에는 가방처럼 어깨에 메고 다니다 필요에 의해 바퀴를 세우고 주머니를 벌려 장 본 것을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처음 그걸 들고 내가 봐 두었던 채소 가게에 들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박스를 잘라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써 붙인 가격표에는 '열무 한 단 500원'
'500원? 5000원이 아니라 500원?'
나는 순간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읽어본다.
안 그래도 어떤 할머니가 '이거 한단에 500원이여?'라니 그렇단다.
열무의 상태도 깨끗하고 누런 잎이 하나도 없으니 난 오늘 이걸 안 사면 큰 죄를 짓는듯한 생각에 한참 동안 열무가 아른거리며 괴로울 것 같다.
결국 1500원에 열무 석단을 사고, 한 묶음에 100장이 든 깻잎 다섯 봉지를 5000원을 주고, 값을 치렀다.
내리쬐는 뙤약볕에도 힘들지 않다. 햇빛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그늘을 골라 캐리어를 끌고 십 분쯤 걸어 집에 도착해서는 열무를 다듬고 절인 후, 반은 열무 물김치, 반은 국물 없는 열무김치를 담그고 보니 벌써 점심 끼니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깻잎 500장...
그 양념도 만만치 않을 테지만 그 위에 올라가는 고명이 많으면 남편에게 일일이 떼어주기도, 먹기도 힘들어져 고명은 많이 올리지 않는 편이다.
올린 것이 별로 없어 화려하지는 않지만 슴슴한데다 향긋하고깔끔한 맛에 입맛을 돋구는데는 전혀 손색 없는 반찬이 된다.
반나절이 넘도록 김치를 담고, 500장의 깻잎 양념을 올리다 보니 어깨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하지만 아까 채소 가게에서 보았던 오이지용 오이 50개 13,000원이 눈에 계속 밟힌다.
'오이지를 안 담기로 했는데... 담아? 말아?'
사실 작년에 오이지를 담은 후, 손으로 일일이 오이지를 짜서 무치느라 힘이 들었기에 물기 짜는 도구까지 사 두었는데 올해 오이지를 담지 않아 방치된다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하는 묘한 이유를 끌어대며 다음날 아침, 나도 모르게 캐리어를 끌고 채소 가게 앞을 서성인다.
기어코 오이 반접을 사 들고 들어와 뭔가에 홀린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작업을 시작한다.
1. 싱크대를 깨끗이 닦아 물을 받은 후, 베이킹 소다를 녹인 뒤 오이를 잠시 담가 두었다가 꽃잎을 제거하고, 상처가 나지 않도록 뽀독뽀독 씻어둔 오이의 물기가 대충 마르면 키친 타올로 일일이 하나하나 닦아낸다.
2. 다이소에서 구매한 가장 큰 지퍼팩에 25개씩 오이를 차곡차곡 넣고, 간수를 뺀 굵은소금 600ml, 식초 400ml, 소주 600ml, 설탕 1kg(우리 집엔 흑설탕이 있어서 그걸 사용했고, 올리고당이면 800ml 쯤이면 되겠다)를 섞어 반씩 나누어 붓는다.
여기서 물을 넣지 않고, 소주를 넣는 까닭은 소위 골마지(간장, 된장, 술, 초, 김치 등의 물기가 많은 음식물 겉면에 생기는 곰팡이와 유사한 물질)가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소주가 없을 때는 맛술로 그 역할을 대신한다.
정말 간단하다.
여기까지가 끝이다. 다만 하루가 지나면 골고루 양념이 배도록 지퍼팩을 뒤집어 놓으면 되는데 짠 기운의 굵은소금이 무게에 못 이겨 지퍼팩에 상처를 내는지 미세한 구멍 사이로 양념 국물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는 김치통 양 쪽에 각각 나누어 담고 양념 국물을 다시 부어 두었다.
하루가 더 지나자 소금, 식초, 설탕 등이 녹으면서 오이 속에 들어가 삼투압을 일으키며 제법 액체량이 많아지고 오이는 갈색빛을 내며 쪼그라드니 두 통이었던 오이를 꺼내어 모두 한 통에 옮겨 담았다.
나는 4일 동안 맨 윗줄의 오이를 밑의 오이와 바꿔 놓으며 양념이 잘 배도록 한 후 물기를 따라 버리고 오이만 냉장고에 넣어 보관한다.
쪼그라든 오이를 송송 썰어 물기를 짜내고(물을 넣지 않아선지 물기도 많지 않다)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올리고당이나 설탕, 깨소금 등을 넣고 무쳐내면 그야말로 기가 막힌 추억의 여름 반찬이 되는 것이다.
열무김치를 넣고, 새콤달콤 비빔국수를 만들어도 좋고, 고추장과 계란 프라이를 얹어 화룡정점 참기름 또는 들기름을 두른 비빔밥을 크게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그 얼마나 황홀한가 이 말이다.
여기에 된장찌개나 청국장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어떤 이가 들으면 비위가 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가끔 비빔밥에 소량의 마요네즈를 짜 넣어 밥을 비비기도 하는데 그 모습을 본 큰 딸이 거기에 그걸 왜 넣느냐며 황당해했지만 지금은 마요네즈를 안 넣으면 비빔밥을 못 먹는다며 농담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했었다. 고소함이 배가된다.
밑반찬 몇가지만 있어도 여러 다른 연출에 따라 음식의 분위기가 바뀌니 얼마나 즐거운가...
뭐 행복이 따로 있나....
시원한 에어컨 바람맞으며 물에 만 밥에 오이지 한두 개 올려 먹으면 그게 행복이고, 뜨거운 밥 위에 깻잎 김치 한 장 덮어 먹는 그게 행복이지....
이 깨알같이 소소한 행복을 잊지 못해 비루한 몸뚱이를 놀려 수고로운 노동을 하는 것이다.
가족들의 함박웃음을 지켜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고, 아내의 마음인 것이다.
'산들바람 부는날'이 어느덧 30화를 맞으며 연재를 마무리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써 냈던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가 다소 슬픈 감정을 많이 표현 한 이야기라 다른 작품은 큰 생각없이 가볍게 읽고 즐길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