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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15. 2023

1막 2장. 한 아이

의사 선생님은 그녀에게 노산인 데다 초산이니 아기와 산모를 위해 제왕절개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아이를 낳지 못해 한이 맺힌 그녀는 2.7킬로의 여자 아이를 낳게 되고, 그녀의 몸조리를 해 줄 친정 엄마나 여자 형제가 없던 그녀를 위해 지난날 돈을 빌려서 갚지 못하던 여자 친척 중 한 명이 미역국을 끓이고 아기를 씻기는 등의 시중을 들어주겠노라 자청했다.


자신은 전혀 원치 않았던 과정을 거쳐 사생아로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아이는 호주제가 폐지되기 훨씬 전, 그 누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갔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 근심을 잔뜩 짊어진 나이 많은 미혼모의 고단한 삶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아이는 엄마와 있으면 세상 행복할 뿐이다.

엄마의 팔에 안겨 여름 밤하늘을 바라보며 세어보던 별들도,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돌아와 실망하며 어스름 저녁 엄마의 손을 잡고 자전거를 찾으러 다니던 그날 저녁도, 동네 언니들과 교회에 따라가 헌금하려던 오십 원을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도, 밤마다 함께 누워 엄마의 동화책 읽어주던 목소리에 잠자던 그날 밤도, 심청전을 읽어준 다음날 왠지 슬픈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심청이처럼 빨래터에 몸을 던져 겨울철 불어난 물살에 떠내려 가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에 의해 가까스로 구해지던 그날도...

엄마와 있으면 아이는 그저 행복했다.

그 모든 날들이...


아이의 엄마는 전남편에게 집을 판 돈을 가지고 몇 년간 별다른 직업 없이 살아왔다.

은행 금리가 신통치 않았고 부동산 재테크가 뭔지도 모를 시절이었기에 친척들이 높은 이자를 쳐 주겠다며 돈을 빌려 달라는 말에 여기저기 돈을 빌려주기는 했으나 이자조차 갚기에 여의치 않아 거의 떼인 돈이나 다름없는 돈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 와중에 아이가 태어났지만 가정이 있는 아이의 아빠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라 달리 돈 나올 곳이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연락을 끊고 나서도 좁은 지방에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누군가가 아이 아빠의 행실을 상부에 밀고를 한 까닭에 아이의 생부는 육군 대령까지 진급하다 불명예제대를 했고 그의 가정은 쑥대밭이 되었다.


한창 예쁜 짓이 늘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있고 싶지만 이제 남아있던 돈도 거의 떨어져 가고 친정 부모도 없어 아이를 맡기고 나가 돈 벌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나날이 지날수록 아이의 엄마는 근심이 더 해 갔고 철 모르는 아이는 그 행복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다 아이와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이가 만 네 살이 되던 해

'이제 제 손으로 밥은 잘 떠먹는구나...'

싶었던 아이의 엄마는 친정 오빠집에 아이를 맡겨두고 숙식이 가능한 곳으로 가서 일을 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나의 외삼촌은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고 박학다식했다.

특히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재주가 뛰어나, 한창 전쟁중이던 때, 서울대 미대를 지원하여 합격의 기쁨을 맛보게 었지만 미처 입학도 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 해 혼자 두 남매를 길렀던 존경스러운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갓 스물이 된 그는 세 살 어린 열일곱 여동생과 연세 많으신 친할머니를 부양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여동생을 대학에 보내 달라는 것이다.


당시 서울대학은 부산으로 피난을 와 있던 상황이기에 3월이 되자 외삼촌은 매일 아침 마산에서 부산으로 통학을 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서울로 옮겨지자 학업을 계속 이어가야 했던 외삼촌은 서울에 올라가 자신의 학비와 집안의 생계 또한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러던중 서울에 온 여동생의 학비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외삼촌은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어느 여고의 미술 선생으로 재직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동생 또한 학업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고 여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

다행히 사는 형편은 점점 나아져갔다.


서른여덟이 되도록 제 머리를 스스로 깎지 못하던 외삼촌은 친척 중 한 명이 소개해준 여자와 선을 보았다.

선을 보러 나온 여자를 찬찬히 뜯어보던 여동생은 배운 것은 초등학교 겨우 면할까 말까 했어도 착하고 순박해 보여 오빠와 짝이 되어도 좋을 듯했기에 여동생의 주선으로 오빠의 둥지를 틀어 주었다.


그러나 부부는 행복하지 못했다. 생각과 대화의 깊이가 달랐고, 더군다나 둘 사이에는 아이도 없어 곧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 들른 엄마에게 외숙모는 강포에 쌓여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나왔다.


"우째 된 일이고? 누구 아~고?"


" 아~를 나~놓코 즈그 옴마가 죽었다 카드라 이 아~ 위에 형제가 다섯인가 있는데 집이 가난해가~ 묵고 살 긋도 읎고 키아줄 사람도 없어가~ 택시일 하는 즈그 아브지가 갓난쟁이를 옆에 태우고 택시 일을 했다카대~

운전하다가 분유 타 미기고...

그래도 사는기 어려버서 도저히 몬 키운다꼬

아~ 읎는 집을 찾다가 우리집에 오게 됐다 아이가...

지금 태어난지 육개월 된다 카드라"


"그래서 둘이서 이 아~를 키알라꼬? 오빠는 뭐라카대?"


"우리가 아~가 없어가 집이 삭막하고 오빠는 저래 내 하고 말도 안통한다 카고, 고마 우리 자식으로 생각하고 키알라칸다"


"언니야 잘 됐다. 잘 키아봐라"


아닌 게 아니라 아이는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지 개월수에 비해 비쩍 마르고 시커먼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자식이 생기고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에 둘 사이가 좀 나아지나 싶었지만 자녀에 대한 양육관이 다르다 보니 또 다른 골이 생겨났다.

더군다나 돈을 굴리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외삼촌과 반대였던 외숙모는 외삼촌이 다른 일을 하기를 원했다.

외숙모의 성화에 못이겨 결국 외삼촌은 학교를 퇴직 하고 시장에서 함께 그릇 가게를 운영하게 되는데 그나마 배운 사람이라 하여 시장 상인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외삼촌은 시장 일이 끝나면 사람들을 만나기에 바빴다.

발이 넓고 여러분야에 관심이 많던 외삼촌은 문인과 화백들을 만나 술을 기울이거나 선후배 사이였던 김영삼 전대통령을 비롯한 다른 정치인들과 함께 산행을 하기도 하고, 스포츠계 감독들과도 넓은 교류를 가지는 사람이었으니 외숙모는 그 모든게 버겁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누이와 함께 아이를 낳지 못하던 때는 상관없었다.

내 배 불러 내 젖을 온전히 먹일 수 있는 내 피붙이를 낳고 싶었는데 같은 처지였던 시누이는 그런 자식을 얻었고, 그녀는 그렇지 못하다.

여동생과 함께 아이를 바라보며 어린 조카의 재롱에 함박웃음을 짓는 남편의 눈빛 또한 데려온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것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 아이를 이곳에 맡겨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겠다니....

벨이 꼬이고 속이 타 들어갈 지경이지만 시누이가 이혼 전 자신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도와준 까닭에 쉽게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들를 때는 외숙모가 마지못해서라도 그냥저냥 잘 대해 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엄마가 오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외숙모는 눈에 띄게 나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먼저 런닝셔츠와 팬티 이외는 옷을 입히지 않았다.

잠들고 깨어난 그 옷차림으로 바깥 심부름도 시키고 밖에 나가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은 유아적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차림새로 아이들 틈에 끼어 있으니 나는 그 동네에서 엄마 없는 팬티만 입고 다니는 애로 유명했다.

동네 아이들이 나와 놀아주기는커녕 나를 빙 둘러싼 채 기존 노래 가사에 나를 놀리는 가사를 넣어 바꿔 부르며 때리거나 밀쳐냈지만 외숙모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듯 한 느낌이다.

빈집에 혼자 남겨지기 싫었던 나는 부끄러움도 이겨내고 어떻게든 속옷 차림으로 밖에 나가 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하루는 공터에서 누군가가 날 밀어 넘어뜨렸는데 환삼덩굴이라 불리는 가시풀숲에 내 오른쪽 다리가 박혔고 뭔지 모를 뻐근하고도 찌릿한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뭐가 어찌된 상황인지 알 수는 없지만 풀숲 속에서 무거워진 다리를 힘겹게 들어올리자 커다란 맥심 커피병이 날카롭게 깨져 뾰족한 모서리 두 곳이  다리에 박혀 있었다.

다섯 살 난 아이 다리에 무거운 맥심 커피병이 박혀 올라왔지만 나를 밀어버린채 모두 도망가고 혼자 남은 공터에서 내 손으로 커피병을 쑥 뽑아내었다.

다행히 깊이 박혀 있지는 않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걷기가 힘들었지만 돌바닥에 넘어져 구멍 난 팬티를 입고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외삼촌이 며칠간 집을 비운 사이였던지라 외숙모는 내 상처를 봐도 아무 관심이 없었고, 누런 고름이 찐득찐득하게 흘러내려도 나는 또 닝과 팬티 차림으로 밖을 나간다.

며칠뒤 집으로 돌아온 외삼촌이 다리의 상처를 보고

"이 고름 좀 봐라...."

라며 안타깝게 내 다리를 어루만지고 매일저녁 약을 발라주었다.


또 어떤 날은 그나마 나와 놀아준다던 아이가 근처 국민학교 근처에 개구리를 잡으러 가자고 한다.

우리는 라면 봉지에 개구리를 넣어 오겠다며 학교 근처 도랑에 들어가 쭈그려 앉아 개구리를 잡고 있었다.

마침 하굣길이던 남자아이들은 나를 보자 도랑 위에서 자신의 고추를 꺼내고는 우리를 조준해 이놈 저놈이 오줌을 내갈긴다.

방법이 없어 몸을 한껏 말아 머리를 숙인채 웅크려 앉아 더러운 오줌줄기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집으로 돌아가도 외삼촌이 없다면 아무도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없다.

내가 알아서 옷을 벗고 씻고는 또 다른 런닝과 팬티로 갈아입을 뿐이다.


화장대 위에 올려둔 사진 속엔 둥근 챙 모자와 유치원복을 입고 외숙모와 함께 한껏 웃고 있는 사촌 언니가 부러워 목이 메도록 눈물이 흘렀다.


밤이면 외삼촌, 나, 언니, 외숙모순으로 잠자리에 들게 되는데 외숙모는 내가 보라는듯 유난히도 언니를 끌어안고 사랑한다며 쪽쪽거리고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두들겨댔다.

너무도 괴로운 나는 절대 옆을 돌아볼 수 없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지만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려 양쪽 눈가를 시작해 베개를 흠뻑 적시는 일이 매일이었다.

어린 나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콧물을 들썩이는 나를 느끼는 어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고, 어두움 속 한 공간에서 한 사람은 괴로움을, 다른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쾌감을, 한 아이는 절망과 슬픔을 또 다른 아이는 기쁨을 느끼는 혼돈의 밤이 계속되었다.


나 때문에 외삼촌과 외숙모의 골은 더 깊어졌고 그로 인해 고성이 오가는 싸움이 더욱 잦아졌다.

외삼촌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며 술로 매일 밤을 보내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더군다나 세 살 많은 언니보다 영특했던 나는 같이 앉은자리에서 무언가를 함께 가르쳐도 나는 열 가지를 이해하고 알아들었고 언니와 함께 놀 때면 여지없이 언니가 내 지시를 듣게 되는 꼴이 되니 외숙모의 히스테리는 날로 더 해 갔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싸운다...

나 때문에.....


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인지 언니가 학교를 가고 외숙모를 먼저 시장으로 보낸 외삼촌은 나에게 바지와 윗옷을 입히고 점심시간이 되면 손수 고등어를 구워 가장 도톰하고 깊은 살을 떼어내 한가득 밥을 뜬 숟가락 위에 올려 내 입에 넣어준다.

내가 제비 같은 입을 벌리면 외삼촌도 나를 따라 입을 벌리는 시늉을 하며 밥을 떠먹여 주곤 했다.

무릎에 앉혀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준다.

함께 시장에 데려가면 종종 순댓국을 시켜 순대 속 당면과 소를 둘러싸고 있는 겉껍질을 내가 먹기 좋게 돌돌 벗겨내어 준다.


학교에서 바로 시장으로  온 언니와 함께 핫도그를 사 먹으라며 천장부터 고무줄이 달린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주욱 끌어내려 오십 원씩을 꺼내 주면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로 가서 밀가루가 태반인 두툼한 핫도그에 설탕을 묻히고 케첩을 뿌려 어린 내 새끼손가락만 한 소시지가 나올 때까지 야금야금 아껴 먹는다.


어떤 날은 그릇 가게를 외숙모에게 맡겨둔채 언니와 나를 데리고 농구장이나 야구장에 데려가 경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음악회에 데려가 저녁밤 별을 보며 돌아오기도 했다.

언니는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로 그림일기를 써야 할 때면 외삼촌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졸라대기도 했는데 그럴때면 항상 나를 언니 옆에 그려 넣곤 했다.

언니가 어떻게 일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또 졸라대면 외삼촌은

'오늘 애기와 함께 시장에 갔다'

라며 일기의 한 문장을 불러주는 대로 언니는 받아 적는다.

'애기......'  

내가 외삼촌에게 불려지는 사랑스러운 이름 '애기....'

애기라는 이름이 행복하면서도 가슴이 아리듯 이상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외숙모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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