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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08. 2023

1막 1장. 한 여자

금요일마다 연재할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실존하는 이들이기에 대부분 가명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때는 아직 해방이 되려면 십년 세월이나 꼬박 기다려야 하는 일제시대였다.

당시 기자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다섯 살에 여의고 열일곱이 되던 해 2월, 어머니마저 잃게 된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그나마 남아계신 친할머니를 의지하고 살아가야 했다.

그마저도 세 살 위였던 오빠는 대학에 다니며 여동생과 할머니의 삶을 책임지는 퍽퍽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 당시 대학에 간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교육열이 강했던 어머님의 유언으로 세 살 많은 오빠가 학교를 다니며 돈을 벌어 자신과 여동생의 학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전쟁이 막 끝난 보잘것 없던 시대에 갓스물 넘긴 남자가 학교를 다니며 일할 곳이 그리 많지가 않았던지라 그녀는 끝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스무 살이 넘기도 전에 이미 혼처가 정해지던 시절이었지만 부모가 없는 그녀는 서로 좋아 지내는 사람이 있어도 선뜻 혼사를 이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 당시 여자로서는 고학력자였던지라 고등학교 때부터 한 그룹으로 친하게 지내던 서울대 치의과에 입학한 남자도, 서울대 정외과를 다니는 남자와도 연애는 했지만 아무리 할머니가 살아계셔도 부모 자리와 할머니 자리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기에 선뜻 혼사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녀에게 지역 신문 기자로 일하는 나이차가 적잖이 나는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로 혼사가 오갈 즈음 이웃이 전하기를 그 남자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다고 했다.

남자를 추궁하여 물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실은 부모님이 자기도 원치 않는 혼처를 정해 놓은 탓에 억지 결혼을 하여 둘 사이에 일남일녀의 자식만 낳고 서로 헤어졌다고 했다.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몸져 앓아 누우며 남자를 끊어내기로 했지만 마음 가득 품고 있던 그를 떨쳐 버리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졸지에 세 살 여자 아이와, 한 살 사내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되어 가정을 꾸렸으나 정작 둘 사이에서는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방생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에 거북이 한쌍을 사서 바닷가에 풀어놓았더란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거침없이 세차게 헤엄쳐 가는 거북이를 바라보며 부디 아이 하나만 낳게 해 달라며 소원을 빌기도 했고, 사월 초파일이 되면 연등을 달아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기도 했었다.

자상한 남편과 정원 딸린 집을 짓고, 일 하는 사람을 두는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임신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번에는 찰떡같이 임신이겠지 싶어 병원에 찾아가면 상상임신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와 눈물을 흘리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그렇게 17년의 결혼 생활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이던 친구가 집으로 전화를 하여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숙아.... 일단 마음 잘 추스르고 들어라...."


"무슨 얘긴데 딴 날 하고 다르게 와그라노?"


"있다 아이가..... 정기자가........

다른 여자하고 살림을 차맀다 카드라"


"뭐라꼬? 니 지금 무슨 소리 하노?

정신이 나갔나? 그런 쓸데 읎는 소리는 오데서 들읐노?

내한테 지금까지 을매나 잘하고 사는지 니가 모르나?"


"알지 왜 몰라... 나도 이리 놀랬는데 니가 우찌 믿을 수 있겠노...

숙이 니가 충격 받을 끼라는거는 알지만도 친군데 모른척하고 도저히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란다 아이가"


"니가 지금 무슨 말을 오데서 듣고 와가 이라는지는 몰라도 세상 남자가 다 바람을 피아도 이 사람만은 아이다.

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라카그등 고마 전화 끊으라"


"그래... 알았다. 내는 니가 걱정이 돼 가...

숙이 니가 오죽 잘하겠나..."


그날 저녁 퇴근을 한 남자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우물쭈물 당황하는 것이 못내 이상했지만 차마 그럴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느 날처럼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이른 저녁쯤 스무 살 초반이나 되어 보이는 앳된 여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이~가 정기자님 집이지예?"


"예.. 그런데 누구십니꺼?"


"이 집에 사모님 맞습니꺼?"


"예... 무슨 일로 왔습니꺼? 우리 남편은 어제 특근 한다고 나갔는데예?"


"아.... 그래예...."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예? 다음에 약속을 잡아가 다시 와야 될낀대예?"


"........... 사실은예.......

하고 정기자하고 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는데예... 오늘 아침에도 우리 집에서 출근 했다 아입니꺼!"


"뭐라꼬??? 지금 이기 무슨 소리고?"


"옴마!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합니꺼!

 이 여자 이거 내 학교 삼년 선배라예. 간호원 아입니꺼"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열여덟살 된 아들이 한 마디 거들었다.


" 여자 이거 미칬는갑다. 옴마 이 정신 나간 여자 쫓아내야 합니더!!

나가라 이~가 오데라꼬 와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씨부리쌓노"


아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여자를 끌어내려 하자


"현진아 내한테 이라몬 안된다. 내 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마라 그라고 아줌마는 지금까지 아~도 못 낳는데 우리 정기자 인자 그만 놔 주는기 좋겠습니더!!!!"


"이기 지금 돌았나? 안나가나?"


하며 함께 있던 아들과 딸은 막무가내로 들어오려는 여자를 밀쳐내어 두 세개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자 잔디 밭에 나동그라진 앳된 여자는 두 손으로 배를 움켜 쥐며 


"이라몬 안 된다... 이라몬 안돼...

내 뱃속에 느그 아버지 아~가 들었다!!!!'


'무슨 소릴 들었던가...

뭐라고? 나는 17년을 노력해도 갖지 못하는 남편의 아이를 저 어린 여자 애가 가졌다고???'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한 충격이 몰려오며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저녁 무렵 머쓱해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온 남자에게 사실 확인을 하자 그는 모든 것을 시인했고 그녀는 그의 눈알이 빠져라 뺨을 후려갈겼다.

그렇게도 자상했던 사람이... 결혼한 지 이십 년이 가까워오도록 매일밤 손깍지를 끼고 잠이 들던 그 자상했던 사람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마다하지 않던 그 사람이 자식 나이의 어린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제 지난 모든 일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부동반 모임에 가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한 사람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호텔을 고갯짓 하며


"저~ 매일같이 하루가 머다하고 가는 사람 있다 아이가"


"맞다. 어제는 미스김, 오늘은 미스박... 이 여자 저 여자 막 바까가 저~ 간다카대? 니도 소문 들었나?"


"하모 알지... 그 남자 마누라만 모르지 이 시내 바닥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오데 있노?"


라며 자기들끼리 떠들던 소리가 자신의 남편을 지칭한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고 또 어느 하루는 늦은 저녁즈음 초인종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자신이 댄서라며 정기자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속옷 차림의 남편이 불쑥 나와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며 얼른 가라고 하니 순순히 돌아서 가더란다.

무슨 일이냐 묻는 말에 취재한 사건의 기사에 대한 앙심을 품고 저런다고 둘러대던 남편이 속옷 차림으로 나온 것이 못내 이상했지만 평소에 너무나도 다정했던 남편이라 그것 또한 아무 일도 없는 듯 순진하게 믿었던 지난 일들이 이제 퍼즐처럼 맞춰졌다.


알고 보니 바람둥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그의 여성편력이 심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큰 충격에 빠졌지만 아이가 없어 벌어진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듣고는 용서하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법적 절차가 허술했던 그 시대여서였을까 지방이어서였을까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이혼 접수로도 그게 가능했는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 자신은 이혼녀가 되어 있었고, 그녀 몰래 집을 판 그 남자는 그것으로 위자료를 대신한다고 했다.

비록 돈은 손에 쥐었으나 그렇게도 믿고 사랑하던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17년간 남의 피붙이를 둘이나 키우던 여자는 하루아침에 오갈 데가 없어져 버렸고, 비통하고 원한이 사무친 마음에 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할머니도 친정 엄마도 없어 결혼한 오빠를 찾아가자 오빠가 집을 구해주며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십이 되도록 자식도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옥 같았던 그녀는 전 남편의 불륜 소식을 알려주었던 친구의 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친구는 세 남매를 두고 바람난 남편과 이혼을 하고 언니가 운영하는 제법 큰 식당에 카운터 일을 보고 있었기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끼리 하소연도 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그나마 그녀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친구 언니의 식당은 그 지역에선 이름만 대면 모두 알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고 군인 간부들이  회식 장소로 자주 찾는 곳이었는데 마음 붙일 곳 없던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보다 여덟 살 연상의 새로운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와의 만남이 일 년쯤 되던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입맛도 도통 없는 데다 몸이 나른한 것이 속이 메스껍고 불편한 느낌이 몇 달째 계속되자 애도 못 낳는 몸인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그 해 겨울은 어찌나 춥던지 약을 먹어도 도통 낫지 않는 감기 탓에 처방전 없이 약사에게 약을 짓던 시절이었던지라 너무 추워 팔짱을 끼고선 약국에 찾아갔다.


"이번 겨울은 와이리 추운지 모르겠네예...

감기가 와이리 안 낫노....

약을 쪼매 독하게 지아 주이소"


"그래예??... 혹시 애기 가진거 아입니꺼?"


"오데예... 세상 여자들은 다 임신을 해도 내는 절대로 임신을 하는 사람이라예...

아이구 이번 겨울은 와이리 춥노.. 춥어서 몬살긋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우찌 압니꺼..

약은 내가 알아서 조제해가~ 드릴게예"


집에 돌아와서도 이상한 증상은 도통 가시지를 않았다.

간절히 먹고 싶었던 음식을 해 놓고도 밥상 앞에 앉으면 이내 속이 메스꺼워지니 꼭 아이를 가진 사람이 입덧 하듯한 증상이었지만 이전에도 이런 증상이 있어 병원에 가면 상상 임신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왔고 매달 있는 달거리는 처녀 적부터 석 달, 넉 달 띄엄띄엄 있어왔기에 그것이 임신 증상의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살이 찌면 온몸 전체가 다 쪄야 하는데 배만 자꾸 나온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걸까? 딱히 변의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는 듯 자꾸 꾸물거림이 느껴진다.

무서우리만치 짙푸른 남색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혼자 목욕을 한다던지 찰싹이는 에메랄드빛 초록바다, 가을하늘처럼 파란 맑은 바다를 매일밤 꿈속에서 보면서도 왜 이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또 어떤 날은 방 안으로 들어온 용이 눈에서 삼색 불빛을 강렬하게 쏟아내며 벽을 타고 다니는 꿈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도 했다.  

매달 이상한 증상이 순서를 바꿔가며 되풀이되던 5월 어느 날 내 인생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임신이 아닐까 하여 산부인과에 가 보기로 한다.


초음파를 보겠다며 누워 있던 그녀에게 의사 선생님은 '쿵쿵 쌕쌕'하는 소리를 들려주며 이런 소리를 예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한 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선생님은 격양된 목소리로 마흔두 살에 첫 임신을 하신 분은 우리 병원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며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임신이라니.....

나에게는 불가능할 줄 알았던 임신이라니....

거북이를 바닷가에 방생해서일까 연등에 소원을 빈 까닭일까...

아이를 낳지 못해 억울한 이혼을 당했던 나에게 임신이라니....

첫아이라 그런지 임신인 것 치고는 배가 많이 불러있지 않던 팔 개월에 이를 때쯤에서야 임부복을 사 입고,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와 육아백과도 사놓고, 배냇저고리며 속싸개, 겉싸개, 젖병...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다 나르며 짧지만 너무도 행복하고 강렬한 임신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를 만나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해 이혼까지 당했던 내 뱃속에 당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하자 주체할 수 없이 기쁜 그녀의 감정과는 반대로 그의 낯빛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사춘기에 이르는 자녀들 넷과 부인이 멀쩡히 있던 그는 절대로 절대로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자신의 가정과 사회적 지위가 뿌리째 흔들릴 위기에 놓인 그는 몇 날 며칠을 필사적으로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결혼 생활 17년 동안 단 한 번도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던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좀처럼 생각지 않았던 그로서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당장 낳아도 거의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을 아이를 산부인과 의사인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그녀는 극구 반대하는 그를 잠재우기 위해 몇 시까지 가겠노라고 거짓말을 해 놓고는 바람을 놔 버리니 하루종일 기다리던 그는 땅이 꺼지는 실망감으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지난 몇십 년간을 얼마나 기다렸던 아이인가....

그것도 온전히 다 큰 아이를....

절대로 그럴 수 없노라고 어떠한 고난과 결과가 뒤따르더라도 아이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출산을 극렬히 반대하는 그에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쓰지 말라며 이별을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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