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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Apr 19. 2024

1막 20장. 외삼촌의 죽음

한 반 밖에 없는 시골 학교는 학년이 달라졌어도 그대로다.

그리고 친구들과 비교되는 이상한 도시락 반찬도 그대로다.

왜 우리 엄마는 계란 프라이를 다른 애들이 싸 온 도시락처럼 밥 위에 올려주지 않고 둥그런 스테인리스 그릇에 시퍼런 빛이 돌만큼 오랜 시간 동안 쪄낸 그 축축한 계란찜을 밥 위에 올려 주는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책상을 붙여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하는 점심 식사 시간은 학창 시절 내내 내게 고역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보온 도시락 지퍼를 열자 내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소꿉장난 세트에 들어 있는 노란 플라스틱 그릇 안에 허옇게 말라버린 닭발 한 개를 반찬으로 싸 주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공포 분위기를 연출할 때도 있었고, 형체도 없이 짓이겨진 꼬릿한 냄새가 온 교실 가득 퍼지는 멸치젓을 넣어 줄 때도 있으며 나는 멸치 볶음이 더 맛있어 보이는데 내장과 똥을 따내는 수고로움도 마다치 않고 손가락만 한 멸치를 고춧가루와 간장에 버무려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밀가루가 거의 태반이었을 분홍 소시지도 계란 옷을 입히거나 적어도 그냥 기름에 지져 몽글한 기포가 올라온 그런 것이면 좋을 텐데 마치 야생의 날것처럼 비닐에서 꺼낸 소시지를 그냥 도마에서 떡 썰듯 썰어 적나라한 분홍 색소가 쨍한 것을 그냥 넣어준다.

그것을 이미 식어버린 찬 도시락 밥과 함께 먹으면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드려야 할 만큼 뻑뻑한 데다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정성스러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 속도 모르고 담임 선생님은


"이거 이렇게는 못 먹어. 한 번 구워야 돼"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본들 뭣하며 나도 보는 눈이 있는데 그걸 모르겠는가...

너무 산속이라 가정방문을 올 수도 없지만 만약 가정방문을 할 수만 있다면 선생님이 우리 집에 와서 엄마한테 직접 말해 주면 좋겠다.


그날도 어디에 내놓기도 부끄러운 도시락 밥을 먹고 난 수업시간이었다.

갑자기 교실 뒷문이 열리자 모두들 놀라 일제히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몸빼 바지에 면티를 입고 그 위에 아무렇게나 바바리를 걸쳐 입고 서 있다.

집안일을 하던 중 급한 소식에 꾸미고 차려입을 새도 없이 다급하게 산을 내려온 듯 너무나 부조화스러운 옷차림새다.


"친정 오빠가 위독하다고 합니더!!"


엄마는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담임 선생님께 말한다.

나는 당장 책가방을 매고 엄마를 따라 운동장으로 나오니 새아빠도 교문 앞에 서 있다.

외삼촌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옆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가 보다.


올해 설날이었다.

내가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어 외삼촌 집에 갔던 일곱 살 이후, 이미 새아빠와 산지 몇 년이 지났지만 뒤늦게라도 인사를 드리겠다며 외삼촌 집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산속을 걸어 나와 하루에 겨우 몇 대 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해 가장 낮은 등급의 비둘기호 열차를 탄다.

타향살이에 지친 3등급 기차칸엔 고향으로 향하는 이들의 설렘과 긴장감으로 꽉 채워졌다.

고향에 닿기도 훨씬 전 이미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이들, 안 그래도 소리 높은 경상도 사투리로 언쟁을 하는 이들로 인해 콩나물시루 같은 경부선 비둘기호 밤기차는 돛대기 시장을 방불케 했다.

객석의 밝지 않은 뿌연 불빛과 이들의 소리와 형태가 그림처럼 묘하게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룬다.  

그나마 입석이라 자리가 나면 나를 앉혔다가 좌석 주인이 나타나면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지루한 밤기차는 오래도록 무거운 바퀴를 굴리며 철길 위를 달린다.


내가 외삼촌 집에 맡겨졌던 더 어린 시절, 외숙모의 학대를 받던 그때... 외삼촌은 매일같이 술과 함께였다.

몇 년 만에 만난 외삼촌은 결국 간경화로 인해 복수가 차 올라 이제 곧 아이를 출산할 임신부의 배만큼이나 불러 있었다.

외숙모는 남편의 치료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했다.

달리 손 쓸 방법이 없었던 탓일 수도 있겠으나 심각한 병증과는 대조되는 심드렁한 외숙모의 태도에 당황스러울 뿐이다.

곧 죽을 날이 가까워짐을 예감한 외삼촌은 죽기 전 내 생애 마지막 전시회를 여느 때보다 크게 열겠다며 아픈 몸으로 힘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무궁화를 주제로 전시회를 준비하던 외삼촌의 집 한편에는 각양각색의 무궁화 그림이 이미 여러 점 완성되어 있었다.

캔버스 위에 하얀 물감을 식빵에 잼을 바르듯 엷게 펴 바른 뒤 각가지 색채를 만들어내며 작업에 몰두했다.  


새아빠는 박학다식하고 인격적인 외삼촌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책장에 가득 꽂힌 희귀한 고서를 보며 감탄하거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넋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빼곡하게 쓴 일기장을 넘겨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도 했다.

외삼촌의 말 한마디에도 "예, 예"하며 전에 없던 순한 양 같은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더욱 부조화스럽게 느껴졌다.

거기서도 여전히 술을 그렇게나 많이 마시지만 그 며칠만큼은 어떻게든 점잖아 보이려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그러나 엄마는 곧 죽어가는 친오빠와 무엇이 그리 원망될 게 있을까...

외삼촌과 둘이서 옥신각신 말이 오가더니 곧 고성이 오가며 싸움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마치 아빠와 싸우듯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대니 외삼촌은 기운도 없는 데다 할 말을 잃고 소파에 앉아 여동생을 멍하니 올려다보았으며 엄마는 예정에도 없이 짐을 싸더니 우리를 보고 나가자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삼월말쯤....

외삼촌이 위독해져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전화를 받고 우리는 비둘기호 보다 더 속도를 낼 수 있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마산으로 향했다.

이번엔 집이 아닌 병원이다.


"오빠!!! 오빠!!!!"


엄마는 부수듯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부리고 엉엉 운다.

마침 일인실이라 다른 이들은 없었다.


"고모야, 왔나...."


"안된다 카드나!!!??? 인자 우리 오빠 안된다 카드나....!!!!???"


"............"


"언니는 뭐 했는데? 우리 오빠 안 살리고 뭐 했노!!!!"


엄마는 외숙모를 향해 격정적으로 울며 따지고 들었다.

외삼촌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나와 엄마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기가 힘들어 병실 밖 복도를 서성댔다.

병원이 그토록 무서운 곳이었나?

병원 복도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듯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기운이 가득해 몸에 한기가 들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뭐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공포스러운 기분이 들어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외삼촌이 누워있는 병실도 무섭기는 매 한 가지라 들어가 볼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이렇게나 무섭고 소름이 돋는데 속속 모여든 친척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침대 가장자리에 빙 둘러 서서 외삼촌의 손을 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는 듯했다.

오후에 학교 수업을 마친 사촌 언니가 병원에 도착하자 외숙모와 엄마는 를 데리고 집으로 가 있으라 한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었어도 병원이 무서운 건 똑같다.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어 병원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나를 엄마가 안으로 불러들였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난날 외숙모와 함께 나를 학대했던 친척의 모습이 보였다.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두근댔지만 표시를 낼 수 없어 엄마 옆에 딱 붙어 가만히 서 있는다.


그때, 외삼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친척들은 몸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외삼촌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최대한 끌어모아 숨을 헐떡이면서도 조용하지만 분명히 이야기했다.


"선미..... 선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숙이 니가 키아라...."


"오빠!!! 오빠!!!"


외삼촌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힘을 나를 위해 쥐어짜듯 사용하고 숨을 거두었다.

지난날 엄마를 떨어져 온갖 풍파를 겪는 어린 조카를 지키려 발버둥 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상처가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렸던 걸까? 죽어가면서라도 유일한 피붙이를 지키려 세상에 남은 이들에게 보낸 경고였을까?


화장을 마친 외삼촌의 유해를 산에 뿌리고 장례를 마친 후 어른들이 모여 유품을 정리하는 듯했다.

외숙모는 외삼촌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 그림과 책, 또는 어른들이 직접 기록한 일기나 글과 재산 등을 모두 처분해 버린 상태였다.

몇 안 되는 옷가지만 남았을 뿐이다.

그나마 엄마에게 한 점 남은 그림을 가지고 가겠느냐 물었지만 그걸 보면 오빠 생각에 미칠 것만 같다며 거절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내내 남아있다.


외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외숙모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전혀 모른 채 친부모로만 알고 살던 중학생 딸에게 '나는 너의 친엄마가 아니고 네 친형제들이 어디에 살고 있으니 네 갈길을 가라'며 재산을 몽땅 챙겨 재혼을 했단다.

언니가 친 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나조차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한창 사춘기를 지나는 언니의 충격은 오죽했을까?

어찌 갓난쟁이 때부터  금이야 옥이야 길러오던 자식에게 모진 상처로 여린 가슴을 할퀴어놓고 단번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 학대를 받으면서 제 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라는 나로선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데.....

 에서 매일밤 사랑한다며 물고 빨고 어르고 달래던 행위들은 그저 나와 외삼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수단이었던가...

십수 년을 기르던 자식을 쫓아내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아간 외숙모를 보며 생전 외삼촌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지 미루어 짐작해 볼 만한 사건이었다.


 '숙아.. 니가 이혼을 안했으모 내가 이혼을 했을끼다... 세상에 니하고 내하고 딱 둘이 남았는데 내까지 그래 할 수 가 없어가 이를 악물고 살고 있다...'

생전에 외삼촌이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더란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아무 준비없이 폭로당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키워준 엄마에게 버림받고 그날로 어딘가로 떠났다는 언니는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아마 제 핏줄을 찾아갔을테지?

어딘가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언니를 꼭 안아줄테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돋보기를 쓰고 엎드린 채 스탠드 불빛 아래서 날마다 몇 시간씩 책을 읽던 외삼촌의 모습이 오늘따라 많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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