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바람 Apr 26. 2024

1막 21장. 이쁜이

열한 살 초여름, 드디어 산속에서 나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전 살던 곳과는 달리 웬만한 큰길은 포장이 되어 있고, 5일 장도 서는 곳이다.

이번에는 돼지를 키우는 돈사의 아랫집이 우리가 살 곳이었는데 담벼락은 향나무로 둘러쳐져 있고, 대문이 없어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들고 날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신작로와 우리가 생활하는 방은 겨우 한지를 바른 방문이 경계가 될 뿐이다.

더군다나 방문을 열고 나와 마루에서 보면 신작로 옆으로 누구네 것인지 모를 무덤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내가 사는 동안 누구도 그 무덤을 들여다보는 이가 없는 듯했다.

그 뒤로는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원이다.

예전처럼 그곳 마당에도 우리보다 먼저 살던 터줏대감이 있었는데 누가 키우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오리 다섯 마리가 해가 지면 앞마당에 둥글게 모여 부리를 한쪽 날개에 묻고 잠을 잔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들 출근이라도 하는양 꼭 다섯 마리가 함께 어딜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다시 마당으로 돌아오곤 했다.

새아빠는 걸어서 십여 분 거리 되는 양조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술값은 들지 않을 듯하다.


이런 곳에도 책을 팔러 오는지 007 가방을 들고 나타난 외판원으로부터 어른 전집을 구매하고 매달 집으로 날아오는 지로에 책값을 보내는 듯했다.

언제나 그렇듯 오밀조밀 집들이 모인 곳과는 떨어진 외딴곳에 살던 나는 방과 후 친구들과 놀다가도 집에 돌아가면 혼자다.

형제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집에서 딱히 할 만한 게 없으니 누구나 지나는 길에 빤히 보이는 툇마루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새로 들인 '제3 공화국'이나 '조선왕조 오백 년'이니 하는 책을 읽는 것이 나의 놀이었다.

사은품으로 끼워준 무협소설을 읽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 책을 몇 번이나 더 읽고도 읽을 책이 없을 때는 내 두 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운 양주동 박사가 집필한 '국어 대사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저녁쯤이었다.

아빠가 퇴근을 하며 옆구리에 하얀 솜털에 까만 코, 동그란 눈의 귀여운 인형을 안고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게 뭐야 아빠??"


60촉짜리 누런 전구를 켜고 방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젖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인형보다 더 귀여운 솜털 같은 강아지였다.


"양조장 사장이 키아라 캐서 데꼬 왔다. 이쁘재?"


"응, 강아지인데 쌍꺼풀이 있어... 와 너무 귀엽다!!!"


엄마 품을 벗어난 강아지는 무섭고 불안한지 우리가 저녁을 먹는 내내 벽 한쪽에 바짝 붙어 부들부들 떨며 낑낑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반으로 접힌 양쪽 귀가 흔들리는데 그것마저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우리가 아빠, 엄마가 되어 줄게... 그만 울어.. 근데 얘 이름을 뭐라고 짓지?"


"암컷이고 얼굴이 이래 이쁜께네 이쁜이라꼬 지으면 되겠네, 괜찮제?"


엄마가 생각해 낸 이쁜이란 이름 외에는 딱히 떠오를 것이 없을 정도로 정말 이쁜 강아지였다.


아빠는 양조장 사장이 키우던 암컷 진돗개가 낳은 예닐곱 마리의 새끼 중 가장 예쁜 녀석을 골라서 데려 왔다고 했다.

어미가 어찌나 영특한지 양조장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단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밖에 내놓은 강아지는 진돗개의 후예답게 마당에서 매일 밤 모여 잠을 자던 오리들을 무덤까지 쫓아내는 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리가 우리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었는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게 딱 그 소리인 듯했다.


어느 날은 방문 밖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집채만 한 돼지가 넓은 귀를 펄럭거리며 떡 하니 서 있다. 돈사를 탈출했는지 마치 방문이라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서 있는데 돼지의 성체가 그렇게나 큰지도 몰랐고, 어른들도 집에 없는데 어쩌자고 방문 앞에 그러고 서 있는지 무섭고 당황스러울뿐이다.

그러자 마루밑에 있던 이쁜이는 겁도 없는지 제 몸에 비해 수 배나 큰 돼지를 앞서 돈사 쪽으로 올라갔다. 돼지는 마치 마법에 이끌리듯 꿀꿀대더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그 뒤를 순순히 따른다.

그들만의 언어가 있나??? 이쁜이는 돼지가 사는 집이 그곳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소리와 냄새로 이미 알고 있었겠지?


이쁜이는 매일 저녁이면 대문도 없는 마당 끝에 앉아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당직을 서느라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알리가 없으니 길가까지 나가 동네 방향을 쳐다보고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린다.

그날따라 내린 첫눈이 바닥에 소복이 쌓일 만큼 차갑기만 한데 아무리 잡아끌어도 아랑곳 않고, 눈길 위에 웅크린채 그대로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아빠가 돌아오자 늑대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펄쩍펄쩍 뛰어 아빠의 품에 안긴다.

과연 말로만 듣던 진돗개의 충직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 충직함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가 학교에 등교할 때쯤엔 항상 나를 따라오곤 했는데 적당히 오다 가면 좋겠지만 교실까지 들어오려는 탓에 부끄럽기가 짝이 없다.

그러니 아침마다 마루 밑에 이쁜이가 있는지 먼저 살피고 길에서도 양 옆과 뒤를 살핀 뒤 학교로 향한다.

그러나 이쁜이는 우리 집 뒷산에서 이미 내가 하는 짓을 다 내려다보고 있었나 보다. 안심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나를 지나쳐 번개보다 더 쏜살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앞장서 걷는다.

사람인 내가 하찮은 개한테 당하지는 않으리라 다시 작전을 짠다.

다음날엔 산꼭대기까지 둘러보다 마침 산 꼭대기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이쁜이와 눈이 딱 마주친다.


'흥! 내가 너한테 두 번은 안 속는다'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척하며 그 녀석을 안심시키고는 발끝을 세워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도롯가로 나왔을 때, 이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혀를 길게 내밀고 숨을 헐떡이며 단번에 나를 따라붙는다.


'하아... 내가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따돌릴 수가 있을까?'


다시 작전을 세운 나는 학교 가는 도중 옆으로 꺾어지는 양조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럼 이 녀석은 내가 아빠를 만나러 가는 줄 아는지 신이 나서 나를 앞지르고, 양조장 사람들이 이쁜이를 반기는 동안 나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방향을 돌려 후다닥 뛰어 학교로 가곤 했다.

매일  녀석과의 전쟁이다.


양조장 앞에선 5일마다 장이 서는데 엄마를 따라나선 길에 이 녀석도 어디선가 벼락같이 나타나 우릴 앞지른다. 그러던 이쁜이가 생선 좌판 앞에서 반질거리는 코를 연신 벌름거리며 꼭 무언가를 살 것처럼 왔다 갔다 하더니만 생선장수가 한눈을 판 사이 생물 오징어를 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개 잡아라!!! 오징어를 물고 달아났다!!!"


뒤늦게 눈치챈 생선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고, 어딘가 한가로운 곳에 가서 훔친 오징어의 맛을 만끽하고 싶었던 이쁜이는 귀를 뒤로 접고는 둥글둥글한 무를 밟고 달아나다 휘청이기도 하고 배추며 나물이며 정신없이 밟고 도망간다.


"개 잡아라!!"


모든 상인들이 외치지만 어찌나 몸이 날랜지 흔적도 없다. 나중에 양조장에 가 보면 어느 개구멍으로 들어왔는지 그곳 구석에서 맛깔나게 오징어를 뜯고 있는 이쁜이를 만날 수가 있었다.


하루종일 어딜 그리 바삐 다니는지 온몸에 도둑가시가 징그럽도록 다닥다닥 붙었고, 하얀 개가 회색 개로 둔갑해 있기도 하다. 그럴 때면 엄마는 버둥거리는 녀석을 겨우 잡아다 한 데서 목욕을 시키는데 햇빛에 앉아 오들오들 떨며 털을 말리다가도 내가 동네 놀러 가는 길에는 다 마르지 않은 몸으로 꼭 따라나선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꼭 목욕을 한 그날은 문이 열린 연탄집에 들어가 연탄을 쌓아두었던 바닥에 온몸을 데굴데굴 굴려 시커먼 개가 되어 나오니 '이 개가 진짜 왜 이러나..'싶을 지경이다.


나를 자기보다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는지 때로 쇠줄을 목에 걸고 나와 함께 걸을 땐 자기가 원하는 장소로 가겠다고 나를 잡아 끈다. 나 또한 그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줄을 잡고 힘겨루기를 하면 이 녀석이 쇠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목을 뒤로 휙 젖히기만 해도 앞으로 고꾸라져버리니 이 개를 이길 재간이 없다.


때로는 과수원 주인이 티셔츠를 벗어 사다리에 걸쳐 놓은 것을 이쁜이가 발기발기 물어뜯어놔서 엄마가 장에 나가 새 옷으로 사 온 적도 있었다.

이쁜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 앞을 거쳐 돈사로 올라가는 '심장택'이란 이름을 가진 아저씨를 보면 유난히도 많이 짖어댔다.

어느 날 저녁 술이 얼근하게 취한 심장택 아저씨가 우리 집 방문 앞에 불쑥 서더니


"아니 이 개새끼가 왜 나만 보면 기분 나쁘게 계속 짖어요?"


"개가 짖고 싶어 짖는데 우리가 우짜란 말이요!!"


아빠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라야 그만좀 하라는 얘기나 해 볼텐데 우리라고 달리 방법도 없다.


"매일 보는데도 계속 짖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왜 나만 보면 이 개새끼가 짖느냐고!!!"


아빠에게 삿대질을 하며 눈을 부라리자 술 취한 아빠는 심장택 아저씨의 멱살을 잡아끌었고 그도 이내 아빠의 멱살을 잡고 마당 가운데를 서로 이리 밀고 저리 밀며 몸싸움을 시작했다.

그러자 이쁜이는 자기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의 주위를 뛰어다니며 아까보다도 더 큰 소리로 왕왕 짖어대고 있었다.

별 소득도 없이 분한 마음을 가시지 못한채 심장택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잘했다.. 니도 내 닮아서 싸움은 잘할끼다"


아빠는 이쁜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는다.

아저씨는 그날 이후로 녀석이 짖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고 살기로 했나 보다.

이쁜이가 이전보다 더 크게 짖어대도 우리 집 쪽은 쳐다도 안 보고 꼿꼿이 앞만 보고 돈사로 올라간다.


동네에서는 아빠와 엄마를 좋아하는 이가 별로 없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찾아온 젊은 아주머니와 엄마가 언성을 높인다.

무슨 연유로 싸움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두 손을 뻗어 머리 끄덩이를 움켜쥐고 욕을 해대며 엎치락뒤치락한다.

당황한 나는 말리지도 못하고 하나밖에 없는 방 안에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둘은 누가 먼저인지 머리끄덩이를 잡은 손을 놓았고, 젊은 아주머니는 머리를 쓰다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선미야... 미안하다.. 어른인 우리가 이런 모습 보여줘서 정말 미안하다."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나는 당황스러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 엄마는 내 앞에서 매일같이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단 한 번도 내게 사과를 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데 낯선 아주머니의 생각지 않은 사과를 받으니 어리둥절하면서도 왠지 내가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미안해했어야 하는 거였구나.....

머리를 세게 한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글쓰기도 좋아했고, 노래도 곧 잘 부른대서 어딜 전학을 가더라도 음악 시간 새로운 곡을 배울 때면 선생님은 꼭 나를 일으켜 먼저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낭독을 잘한대서 선생님들은 항상 나를 일으켜 책 읽기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국어 시간에 '연극'에 대해 배우며 선생님은 각 조별로 과제를 내어 주었다.

각자 배역을 정하고, 대사를 외워 실제 연극을 해 보는 시간이었는데 반 친구들 앞에서 연극이 끝나자 반 친구들 모두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앵콜!!"이란다.

그렇게 아이들 앞에서 다시 연극을 시작했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아까보다 더 큰 희열을 느끼며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와~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잘하냐?"


새로 전학 왔다며 나를 괴롭히던 무리 중 한 남자아이가 격양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나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다.


'내는 재능이 뛰어나가 느그 외할무이가 그 외정 시대에도 다섯 살 때부터 무용학원에 보냈다 아이가..

그라고 내를 방송국 합창단에 입단 시킸다 아이드나... 그런데 니는 도대체 머를 잘하노? 잘하는기 있기는 있나? 니 입으로 말을 한 번 해봐라'


'와이리 아~가 굴종적이고..... 병신긑이'


거의 매일 듣는 엄마의 말에 나 자신이 비참해지고 쭈그러드는 기분이다. 나도 잘하는 게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엄마 앞에서는 기가 눌려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았고,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하자니 유치하게도 느껴진다.


'쳇!! 내 재능을 엄마가 알아주는 거지 내가 이거 잘한다 저거 잘한다고 떠벌리나? 엄마도 할머니가 재능을 알아보고 가르쳤지 엄마 스스로 했나??'


가뜩이나 적응할 만하면 잦은 전학을 하는 탓에 텃세가 심하고 향우애가 강한 시골 아이들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전쟁과도 같은데 집에서는 매일 싸움판에다 내 마음도 몰라주니 열한 살 아이는 어느 날부턴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죽는다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엔 스치듯 지나갔던 생각이 하루하루 더 크게 자리 잡는다.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지? 내가 스스로 죽는 방법은 어떤 게 있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 받침대의 경첩 손잡이를 열어보니 노란색 플라스틱 병에 든 가구 닦는 용액제가 보였다.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던 그것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먹지 마시오,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시오'


'먹지 말라고? 먹지 말라는 것은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게 아닐까? 그럼 이 약을 먹으면 된다는 거네?'


'그럼 언제쯤 이걸 먹고 죽어야 할까?'


겨우 만 십 년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죽음을 실행하는 데는 꽤나 망설여짐도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아빠가 당직을 서느라 엄마와 내가 이불을 펴고 누웠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내 감정이 튀어나왔다.


"엄마, 저 농 닦는 약.... 저거 먹으면 죽어?"


"뭐라꼬? 저거를 왜 묵노!!!"


"아니 그냥... 살고 싶지 않아서....."


"............"


아직은 다 살아본 적 없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그 말을 하면서도 소리 없는 눈물이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엄마는 무슨 생각인지 아무 대꾸가 없다.

다음날 다시 나무함의 문을 열어보니 농 닦는 약이 온데간데 없다.


"선미야, 농 닦는 약 그런 거는 묵으몬 안 된다. 알았제?"


"............."


내가 필요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위로였을까?

약을 치워두고 먹어선 안된다는 엄마의 말 한마디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인지 그날 이후로 죽으려는 노력은 그만두기로 했다.

힘들어도 조금 더 살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겨우 세 명 사는 우리 집인데 바람 잘 날이 없다.

이번엔 얼마 전 엄마와 싸웠던 아줌마의 남편과 아빠가 시비가 붙었다는데 삽으로 그 아저씨의 머리를 때렸다나 찍었다나... 아빠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며 엄마는 나와 이쁜이만 남겨놓고 읍내 경찰서로 가고 없다.

다행히도 많이 다치지는 않은 모양인지 합의금 얘기가 오간다.

그러나 같은 양조장 직원과의 다툼이었기에 아빠는 이제 그곳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우리가 살던 집은 양조장에서 주선해 주었던 것인지 급하게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같은 반 남자아이의 아랫채에 살게 된 나는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한다.

마당과 대문이 있는 셋집인 데다 이쁜이를 묶어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 방과 멀리 떨어진 대문깨에 적당히 묶어 두었다.

매일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이쁜이가 목줄에 메어 나가 놀지도 못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쇠 줄에 어색하게 묶인 이쁜이가 내 키만큼 펄쩍펄쩍 뛰며 예전처럼 반겨주기는 했지만 왠지 슬퍼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내 기분 탓이기만 할까?

결국 학교에 다녀온 어느 날 이쁜이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엄마!!!! 이쁜이 어디 갔어? 이쁜이 어딨냐고!!!"


"이쁜이.... 개장수한테 팔았다........ 니 없을 때 팔라꼬......."


"뭐라고? 이쁜이를 개장수한테 팔았다고?"


"막 안 갈라 카면서 개장수 보고 으르렁 거리고 물라 카드라....."


"당연히 안 가려고 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평소에는 주인집 같은 반 남자아이가 들을까 부끄러워 큰 소리도 내지 못하던 내가 돌아올 수 없는 이쁜이 이름을 연신 불러대며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매번 자신들이 처신을 잘못해서 여기저기 집시처럼 쫓겨 다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 못 하는 짐승까지 개장수한테 팔려가다니.....

새카만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던 내 이쁜이....

때로는 성가시기는 했어도 우리 셋 밖에 모르고 둥글게 말아 올린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대며 반기던 착하고 명랑하던 내 이쁜이가 개장수한테 팔려가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술 취한 아빠가 이쁜이 양쪽 귀에 빨래집게를 꽂아놓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좋다고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쁜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쩔 줄 몰라 마루 밑에 들어가 깽깽거렸다.

녀석의 귀에서 빨래집게를 빼내려 몸을 숙이고 팔을 뻗는 내게 아빠는 두꺼운 유리 재떨이를 집어던졌지만 다행히도 마당 가운데로 떨어진다.


'재미있는데 왜 집게를 빼노!!! 빼지 말고 가만히 놔 두라!!!'


악마처럼 외치던 모습이 떠오르며 고통 속에 떠나갔을 이쁜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발기발기 찢기도록 가슴이 아리고 아팠다.

자식과 주위의 아픔과 고통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다들 제 멋대로 사는 것 같은 모습이 다 밉다.

다들 싫다...


나의 친구 이쁜아....

너와 헤어진 세월도 어느덧 사십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그동안 언니는 지구별에서 적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왔단다.

때로는 아픔만 가득해서 마냥 슬프기만 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 슬픔이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 줄 때도 많았던 것 같아...

그 중 너와 함께 했던 즐거웠던 기억, 너와 헤어졌던 아픈 기억조차 추억이라는 이름이 되어 내 가슴 속에 남아있게 되었어...

지금은 언니도 너를 만났을 때 보다도 더 큰 자녀들이 있지만 이쁜이 너와의 추억을 아직도 들려주곤 한단다..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너의 따뜻한 혀로 닦아주던 따뜻한 혀의 촉감이 많은 위로가 되었고, 외로운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이쁜이...

나에게 또 다른 사랑을 알게 해 준 이쁜이....

세상에 태어나 일년도 채 살지 못하고 떠난 너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너무도 컸고, 너를 잃은 아픔이 참 깊지만....

내가 정을 주었던 멍멍이....

이쁜이 너와의 예쁜 기억을 언니가 아주 오랫동안 간직할게....


                    

이전 20화 1막 20장. 외삼촌의 죽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