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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May 10. 2024

1막 23장. 비뚤어진 마음

뒷마당 커다란 자두나무에선 자두가 풍년이다.

시퍼렇고 딱딱했던 자두는 어느새 윤기가 나도록 빨간 데다 알이 꽉 여물어 한 입 베어 물면 주황빛 탱글탱글한 과육이 혀와 잇몸을 쨍하게 자극하는...

탐스러운 자두가 주렁주렁 열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의 술주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엄마의 자기중심적 사고 또한 바뀌지 않는다.

둘은 어딜 가든 꼭 이웃과 분란을 만들어냈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진학하겠다며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미래가 없는 듯한 나는 공부는 뒷전인가 보다.

이런 증상은 중학교 2학년, 내가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집이 싫고, 내 부모가 싫었던 나는 그저 반항이 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대신 이런저런 단편 소설을 끼적여댔고, 반 친구들이 이리저리 돌려 읽으며 재밌어하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나 수학여행 때는 연극의 지문을 쓰고 전교생 앞에 나가 연극하기를 좋아했었다.

체육대회가 되면 응원단장인 나는 응원에 열을 올리거나 만우절이나 공부하기 싫은 날엔 반을 대표해 자의 반 타의 반 코믹한 분장을 하거나 선생님을 졸라 수업을 빼 달라는 둥 그런 실없는 역할을 하는....

호랑이 선생님과도 우스갯소리를 편하게 주고받는 그런 캐릭터였다.


뚜껑을 열기도 부끄러운 도시락을 계속 싸들고 다니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처음 엄마에게 울며 반항을 해 봤지만 변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결국 밥만 든 도시락과 고추장, 참치캔과 풋고추 등을 가방에 넣고, 교복을 단정히 입은 모습과는 상반되게 김장 양념이나 버무릴만한 커다란 쇠양푼을 손에 덜렁덜렁 들고 버스를 타는 짓궂고 이상한 아이였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이면  마음 맞는 다른 반 친구와 운동장 뒤편 나무 그늘에 앉아 가져온 재료양푼이에 몽땅 털어 넣고 비빔밥을 만든다.  식사 후, 수돗가에양푼이를 닦는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나를 괴짜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그건 내 방식의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영화와  속의 이야기들을 여러 목소리를 내어가며 생동감 있게 얘기하는 재주가 있던 내 주위엔 항상 나를 둘러싼 친구들이 많았고, 쉬는 시간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다른 반 친구들이 써 두고 간 쪽지와 간식거리가 책상 위에 자주 놓여 있곤 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나를 차지하기 위해 울고 다툴 때가 종종 있었는데 심지어는 학교 졸업 후 각자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한 친구가 나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항상 내 주위엔 사람이 너무 많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아빠, 엄마가 밤늦도록 죽일 듯 싸우는 게 너무 싫어 다음날 아침이면 눈을 뜨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따른 반작용인지 학교에서는 괴짜스런 나의 행동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난 어쩌면 들키기 싫은 나의 모습을 감추려 더 우스꽝스럽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도록....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조용히 부르신다.


"선미야......"


"네?"


"너... 왜 공부 안 해?"


"................"


"말 좀 해봐.... "


"..............."


"평소에는 잘만 떠들더니 왜 대답이 없어? 너 왜 공부 안 해? 너 마음먹고 공부하면 되게 잘할 거 선생님은 알고 있는데 왜 공부에 손을 놨어?"


"................"


"선생님이 봤을 땐 선미가 선생님이 된다면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처럼 멋있는 사람이 될 것 같은데 왜 공부 안 하냐고!!! 선생님이 너 보면 너무 아깝고 속이 상해....."


"..............."


평소에는 실없는 농담을 잘도 하던 내가 이런 얘기가 나오니 차가워진 표정을 지으며 속을 꽉 닫고 있다.

요즘엔 학교에도 상담 프로그램이 있어 라포가 형성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았을지도 모르지만 삼십 년 전 시골 학교에서는 그런 제도가 없으니 정확한 이유나 방법을 모르는 선생님이나 상처가 많아 마음이 굳어진 나로서도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후로 내가 사십 대 초반쯤 남편 출장 일을 함께 갔을 때, 손님과 대화를 나누다 상대가 내 모교의 삼 년 후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는 후배님은 현재 교감 선생님이 되셨다는 당시 담임선생님께 내 이름을 묻자 정말 크게 대성할 아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삼십 년 전 선생님의 기억 속에 내가 대성할 만한 재목으로 기억되고 있었다니...

그랬기에 앞에서 소리 높여 응원을 이끌던 나를 그렇게도 빤히 쳐다보셨었나...

그래서 가정형편 때문에 우유를 마시지도 못하던 내게 굳이 다른 친구들이 먹고 버린 우유갑 재활용 당번을 일년내내 전담해서 맡기셨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감사하단 생각 끝에 그럴 거면 철없는 나를 조금 더 몰아붙이지 그러셨나...

부질없는 생각에 훗~ 웃는다.


"아~ 아쉽게도 제가 대성은 못했지만 앞으로 대성할 자녀를 키우고 있어요..."


그 얘기를 들은 내가 후배에게 한 대답이다.

사실 간절한 나의 소망을 나 스스로에게 답한 것이다.


불수능으로 악명 높았던 시험을 치르고 다들 원서 쓰기에 한창인데 나는 별 생각도 없다.

친한 친구들이던 별 대화도 없던 친구들까지 날더러 연영과에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쭉 듣고 자랐던 엄마의 얘기가 날 주저하게 만들었다.

'네가 잘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있냐... 너 같은 게 뭘 하겠냐.. 병신 같다. 바보스럽다. 굴종적이다'

세뇌처럼 뇌리에 박혀 나에게 그만한 재능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한참 커야 할 시기에 자라지 못해 키가 작은 탓에 더욱 위축감이 느껴졌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시골 촌구석 우리 집에서 날 위해 뭘 어찌해 줄 열정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겉으론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 없이 태어나 엄마와 떨어져 살며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이리저리 팔려가다시피 옮겨질 때도, 죽기보다 들어가기 싫은 집구석을 가출 한 번 하지 않은 것도,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매일의 고통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가진 신앙의 힘이었다.

매일 낮밤을 그분께 나의 슬픈 날들을 토해 냈었다.

다른 방에선 거센 욕을 하고 던지는 소릴 들으며 도저히 책을 펴서 공부를 할 수가 없던 그 시간, 나는 성경을 펴서 읽으며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곤 했었다. 

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꾸덕해진 성경책을 펼쳐본다.


'그래.... 그분께 나를 드리자..'


예수쟁이 학교에 간다며 반대가 극심했었다.

배게던 책이던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들어 집어던지고 악다구니를 써 대며 욕을 한다.

이미 성경고사와 면접도 합격했고, 학교 정문 앞에서 나눠주던 '수화 동아리' 홍보물을 보고 있는 날더러


'병신들이 하는 걸 따라 하느냐, 네가 병신이냐!! 내 눈앞에서 꺼져라 이 개 같은 년아!!!'  


누가 누굴 더러 병신이라 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참담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다행히 서울에서 일을 하던 아빠가 집을 구했다고 했다.

사회성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인지라 부동산에서 집을 구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길을 지나다 무작정 들어가 '여기 세 놓는 집이 있느냐'물어서 얻은 지하였다.

화장실과 욕실이 내부에 없어 총각이 사용하는 바로 옆 공용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짤순이를 놓고 쓰는 게 다였다.

싱크대 아래엔 커다란 고무 물통을 심어 놓아 버튼을 눌러줘야 하수 기능이 작동되는데 그것마저도 고장이 나거나 깜빡하고 누군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온 집안에 오물이 넘쳐흐르게 된다.

집안은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데 특히 불을  고요한 시간이면 이것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불을 켜면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부터 개미만 한 바퀴 벌레들이 후다닥 도망가는 것을 매번 볼 수 있다.

습기가 많은 집이다 보니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천근만근인 날이 많고, 선천적으로 빈혈까지 있어 매일 만성피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기관지염을 자주 달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다.

지하철역 출구와 30초쯤 떨어진 곳의 지하 방이다 보니 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집 아래서는 지하철이 지나가는지 철그덩 철그덩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그 누추한 지하 골방은 내가 매일 오랜시간 동안 무릎 꿇고 예배하는 성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


다닥다닥 붙은 서울의 집에서도 아빠의 행패는 여전하다.

가정폭력으로 신고도 해 봤지만 집에 온 경찰은 그저 형식적인 훈방조치가 다였다.

그 후엔 더 가혹한 보복 폭행이 돌아올 뿐이다.

미친 척도 해 봤다.

엄마를 대신해 맞서 싸우며 무차별 폭행도 당해봤다.

나는 어디서라도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두근대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길을 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기만 해도 깜짝 놀란다.


그를 죽이고 싶은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기도 했지만 나의 힘으로는 미쳐 날뛰는 짐승 같은 새아빠를 도저히 감당할 재간이 없고 시궁창 같은 구렁텅이에 나의 인생과 젊음을 던져버릴 수는 없다.

참아야 한다.


당시 학교 상담실에서 MBTI 검사를 한다길래 친구와 별생각 없이 들어갔고, MBTI와 다른 검사가 끝나자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내 차례가 되었을  상담선생님은 모두를 나가 있게 했다.

그러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심리 상태가 너무나 불안정해요. 특히 기성세대와 남자에 대한 적대감하고, 너무나 공격적인 심리상태예요"


"........... 사실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했어요. 그리고 의붓아버지의 가정 폭력으로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이고요..."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의자를 고쳐 앉은 선생님은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말했다.


"이런 상태라면 사실 공부를 할 수는 없어요. 정상적으로는 살 수 없어요. 그런데 학교는 어떻게 올 수 있었어요? 친구가 있나요? 이런 심리적, 정신적인 상황은 솔직히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이 되어 있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예요"


"제가 참 많이 고통스럽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저는 제 인생 목표가 '우리 부모님과는 정 반대로만 살자'였어요. 상담 결과와는 다르게 다행히 지금까지 저를 좋아해 주는 친구도  많고, 서로 교감하며 사는 것을 좋아해요.

제가 비뚤어진 길을 가지 않고 지금까지 저를 지킬 수 있던 건 신앙의 힘이었어요"


"계속 상담받으러 오는 게 어때요? 정말 도와주고 싶어요...."


"괜찮습니다. 내상이 심각하지만 표면적으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았다면 앞으로도 잘 살 거라고 믿어 볼래요"


이제 성년이 된 나였지만 엄마를 혼자 두고 독립할 수도 없거니와 엄마와 함께 어딜 도망가서 살더라도 새아빠는 어떻게든 우릴 찾아내어 보복을 할 거라는 공포감에 엄두를 내기 힘들다.

너무 견디기 힘든 날은 오밤중에 집을 뛰쳐나오 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내가 찾는 곳은 교회다.

그나마도 문이 잠겨 있어 교회 앞 계단에 웅크려 앉아 덜덜 떨며 밤을 우고, 새벽 예배를 드린 후 그 길로 학교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엄마가 일을 나가기 시작하며

괴롭힘의 대상이 없어지자 내가 그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디라도 나가 이 꼴을 한동안은 안 봐야 살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첫여름방학이 되고 얼마 후, 짐을 챙긴 가방을 들고, 일하는 중인 엄마를 불러내어 공개적인 가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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