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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May 03. 2024

1막 22장. 엄마의 사고

스위스의 교육가였고 자선 사업가이기도 했던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이 전학을 하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할 만큼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데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전학인가...

전학도 전학이지만 한 동네에서도 이사만 일 년에 서너 번씩 다니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 집 세간살이는 금방이라도 짐을 싸고 떠나야 할 유목민처럼 간단하다.

지난번 사건으로 아빠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탓인지 내가 5학년이 되던 가을쯤 충청도에서 서울 근교의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물론 이 동네에서도 여러 번 거처를 옮겨 내가 막 중학생이 되던 해에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양계장으로 이사를 간다.

중학교는 군내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지만 이곳까지 버스가 들어오지 않으니 정류장까지 나가는데만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하는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새로 맞춘 어설픈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데 사방이 고요하고 캄캄하다.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내가 어두운 새벽길을 혼자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짠한 모양인지 엄마는 양계장 입구까지 따라 나오며 이미 멀어진 나를 향해 울먹이는 듯하다.


"선미야... 잘 갔다 온나~!!!"


산과 논으로 둘러싸인 새벽길을 걷다 보니 캄캄하던 주위가 어느새 푸른빛을 띠며 점점 밝아온다.

까마귀는 벌써부터 까악거리며 낮게 날아가고, 까치는 바닥에서 제 몸길이보다 더 긴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가다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푸른빛이 도는 3월의 차가운 새벽은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쯤엔 붉은빛을 띠며 어렴풋이 밝아오고 있었다.


닭은 소나 돼지보다는 추위에 더 취약한지 양계장 비닐하우스 지붕 위에는 짙은 회색 천을 여러 겹 올려 그 속은 후끈한 기운이다. 예전에 보았던 토끼 막사와 비슷한 구조인데 이런 비닐 막사가 수 개는 되는 듯하다.

남자 인부들은 가운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는 외바퀴 수레에 좁쌀만 한 누런 사료를 가득 부어 긴 파이프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곳에 자루가 긴 플라스틱 바가지로 쭈욱 사료를 뿌리고 지나간다.

그러자 그야말로 닭장 같은 작은 철제 앵글 속 수백 마리의 닭이 일층, 이층에서 기계처럼 박자를 맞추어 부리로 모이를 쪼아댄다.

하얀 닭들이 모이를 쪼아댈 때마다 작고 빨간 볏이 흔들리고 일렬로 늘어선 닭들의 작은 눈구멍이 입구부터 벽 끝까지 양쪽, 1,2층으로 점처럼 주르륵 박혀 있는 듯하다.

남자 인부들은 곧 닭의 똥을 치우다가도 병들어 쓰러진 닭의 사체를 우악스럽게 꺼내어 외발 수레에 던져 넣는다.

그것뿐인가 '꼬끼오~' 소리를 내며 쑥쑥 밀어내어 놓은 알을 수거하여 밖에 꺼내 놓는 일도 해야 한다.

그럼 그곳에 사는 인부의 부인들은 수거된 알을 일일이 저울에 달아보며 특란, 대란, 중란 등의 크기로 나누어 달걀 위에 장을 찍고는 홈이 파인 계란판에 쏙쏙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그에 맞게 제작된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덮고 붉은색, 푸른색 등의 얇은 비닐끈으로 단단히 돌려 묶는 작업까지 마친다.

그 후에는 큰 트럭의 짐칸에 계란판이 차곡차곡 하나 가득 채워지고 트럭은 내가 나갔던 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병들어 폐기된 닭은 털을 뽑아 먹기 좋게 손질한 후 소금 간을 한 것과 양념이 된 두 가지 종류의 닭을 마당 가운데 장작을 피워 노릇하게 구워내면 산속까지 그 냄새가 진동을 하는 듯하다.

인부들은 그날 하루의 피로를 그렇게 한잔 술과 함께 풀어냈다.


말동무도 없는 새벽길을 한참이나 걸어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또 언덕배기를 올라 학교에 다니는 일이 힘이 들었던지 얼마 되지 않아 코피가 흐르는 날이 아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우리는 또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기게 되었는데 아빠는 양계장 일을 그만두고 집 짓는 일을 하러 날벌이를 하러 다니는 가는가 보다.

그래도 이곳은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지난 집에 비하면 등하교 길이 말도 못 하게 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비탈진 흙길을 내려오다 미끄러져 발목이 부러졌단다.

엄마를 고 병원으로 갔던 아빠는 다음날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어쩌면 엄마의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죽으라고 목을 조르고 때릴 때는 언제고 막상 발목을 절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슬픈 기색이 역력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내려와 진료를 보시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엄마가 골다공증이 있는지 단지 넘어졌을 뿐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뼈가 으스러진 모양이라며 다행히도 뼛속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면 될 것 같다고 하신다.


엄마 없는 열네 살이 챙겨 먹는 밥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아침은 그냥 굶고, 점심엔 학교 앞 가게에 가서 삼백 원짜리 햄버거를 사 먹거나 그마저도 귀찮아 건너뛰는 일이 많았으며 저녁도 집에 가기 귀찮을 땐 병원에서 적당히 군것질거리를 몇 개 집어먹거나 건너뛰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팔꿈치와 무릎의 관절이 구십도 이상은 구부릴 수가 없고, 윗니와 아랫니가 어그러지며 음식을 씹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 껍데기가 훌훌 벗겨진다.

한창 커야 할 나이에 영양실조가 오는 바람에 키 클 시기를 또 놓쳐버린다.


다행히 엄마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허벅지까지 하얀 깁스를 한 채 약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단다.

병원에서 퇴원은 하게 되었지만 다리를 쓸 수 없는 엄마를 대신해 밥과 반찬을 만드는 일, 세탁기가 없으니 손빨래를 하는 등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 살림을 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하고 피곤하다.   

밖에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엄마의 대소변을 치우는 일도 내 몫이다.


 "화장실에다 똥물 버리지 마!!! 오줌이 튀어서 엉덩이에 닿잖아!!"


주인집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요강을 들고 나오는 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며 이야기한다.


'아니 우리 엄마가 오줌만 싸는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도 우리도 똑같이 화장실에서 똥 싸고 오줌도 싸는데 그럼 아저씨네도 오줌은 딴 데 가서 싸나?'


"네......"


마음의 소리와는 다르게 고분고분 대답하고는 그날부터 아저씨가 안 볼 때를 틈타 몰래 화장실에 가서 뒤처리를 하곤 했다.


"야!!! 내가 이거 뒷간에 버리지 말라고 했지? 쪼끄만 게 내 말을 뭘로 알아듣는 거야! 이걸 그냥 확 씨~!!"


마당 한편에서 숨어 보고 있던 아저씨는 잘 걸렸다 싶었는지 손을 들어 올려 나를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아~를 와 팰라 카노!!! 지금 이기 뭐 하는 기요?"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문을 벌컥 열며 소리를 높인다.

그제야 아저씨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슬픔을 꾹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전해 들은 술 취한 아빠는 주인집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주인집 아줌마가 그 소릴 듣고 나와 아빠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아빠는 옆에 있는 나무 빨래판을 들어 주인아줌마를 내려치려는 것을 내 온 힘을 다 해 아빠를 부둥켜안고 죽기 살기로 막아섰다.

다행히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곧 이사할 집을 알아봐야 다.


6월의 어느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니 이미 트럭에 별것 없는 이삿짐을 거의 다 실었을 때였다.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동네 청년이 아빠와 함께 짐을 실어 날랐고 곧이어 아빠가 엄마를 업어 높은 트럭의 조수석에 힘겹게 앉힌다.

나는 얼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 놓고 가는 것이 없는지 빈 방을 둘러보니 미술시간 셀로판지를 유리에 덧대어 만들었던 전등이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나는 신발을 신은채 얼른 방에 뛰어 올라가 전선을 돌돌 말아 쥔 전등을 왼쪽 팔에 감싸 안은채 들고 나왔다.

트럭 짐칸에 타기 위해 바퀴 위에 다리를 올리자 짐을 싣던 청년이 먼저 펄쩍 뛰어 올라가 나를 향해 손을 내려 뻗는다.

유리로 만든 전등이 깨질세라 조심조심 끌어안고 청년의 손을 잡고 힘차게 짐칸을 오른다. 그리고 청년은 다시 짐칸에서 펄쩍 뛰어내려 시동을 걸더니 차를 출발시킨다.


아..... 이 집엔 내 방이 따로 있다.

비록 책상을 맞댄 벽을 통해 옆집에 세 들어 사는 총각네 소리가 다 들려 마치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듯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드디어 나만의 공간이 생기다니... 열다섯 살에 방 한 칸을 차지하게 된 나는 사춘기가 찾아왔음에도 너무 좋아 히죽히죽 자꾸 웃기만 한다.

이제 한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이젠 둘이 싸워도 어쩔 수 없이 생생한 라이브를 안 봐도 되고, 한 방에서 태워대는 담배 냄새를 직격탄으로 맡지 않아도 된다.

나는 방의 불을 끄고 책상 형광등만 켜둔 채 성냥 뒤꽁무니에 물풀을 묻힌 뒤 쌍꺼풀 위에 덧 바른다. 그러곤 잠시 후 꾸덕꾸덕 마른 풀을 떼어내니 본래보다 짙고 굵은 쌍꺼풀이 만들어졌다.

책상 위 거울에 새로 만들어진 짙은 쌍꺼풀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만족한 듯 한 미소를 짓는다.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대며 샐쭉 웃어 보기도 하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여배우의 대사도 새침하게 따라 읊어본다.


그리고, 우리 집에 드디어 전화기가 생겼다.

검은색의 네모진 디자인에 오른쪽은 수화기가, 쪽엔 큼지막하고 네모난 버튼에 숫자가 쓰여 있는데 거기다 공단 느낌의 분홍색 천을 전화기 바닥에 깔고 수화기의 몸통에도 둘러 한껏 멋을 부렸다.

군내 전화국에서 시골까지 들어와 송수신이 가능하도록 연결해 주고 가신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들어본다.

뚜~ 하는 소리가 한참이나 흘러도 딱히 전화할 곳도 없이 몇 초가 흐르자 고막이 찢어져라 '빽빽 빽빽' 소리를 내는 통에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어느 날은 학교에 다녀와 방문을 열자, 아빠가 분홍천으로 둘러싸인 수화기를 들고 화장대의 거울을 쳐다보고 작은 소리로 "여보씨요? 여보씨요?"라더니 거울을 통해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수화기가 삐뚤어지도록 급하게 후다닥 내려놓는다.


어느덧 엄마는 깁스를 풀게 되었지만 일 년 가까이 딱딱한 석고 속에 갇혀 있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 두께의 절반쯤이나 될까 했고 허여멀건한 앙상한 다리로는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재활을 해야 했다.


그 해 12월의 마지막주 가요톱텐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가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1위를 차지했는지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총각네 텔레비전 소리가 내 방에서도 생생하게 들리는 통에 나도 따라 노래를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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